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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몸, 환상적인 가상공간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간을 인식한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념처럼 인간의 의식은 몸이라는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고, 그 테두리는 3차원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공간의 인식은 공간의 점유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러한 육체의 입체성은 인간의 공간 지각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의식을 몸과 외부 사이의 경계에 대한 감각으로 축소시킨 바 있다. 의식은 개인의 육체와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의 산물일 뿐, 인간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결국 몸이니, 그의 주장에서의 의식이란 몸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서 다른 공간에 현전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등장하면서, 과연 의식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제 인간의 의식은 자신의 몸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몸의 감옥을 떠나므로 의식의 가능성은 더욱 풍부해지는 것 같다.
혁신적 의학기술로 주목 받고 있는 원격 수술 로봇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제 의사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얼마든지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자신의 손을 대신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프로그래밍된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의 손에 메스를 쥐어준다. 의사의 의식은 몸의 한계를 떠나 로봇을 조종함으로 더욱 완벽한 수술을 수행할 수 있다.
원격 수술 로봇의 상용화는 의사로 하여금 공간을 초월한 원격현전(telepresence)을 가능하게 해준다. 의사는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이에 따라 의사의 공간 감각은 더 이상 3차원에 속박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거한 3차원의 공간은 동일한 물체가 동시에 다른 위치에 존재할 수 없음을 가정하며, 이곳에 의사가 있고 저곳에도 의사가 있다면 그 둘은 서로 다른 의사여야 한다. 반면 원격 수술 로봇을 사용하는 의사는 이곳에 있는 동시에 저곳에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원격 현전하는 의사는 새로운 공간개념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몸을 완전히 초월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앞의 예만 살펴봐도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공간이 몸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로봇이라는 새로운 몸을 얻으므로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 몸이란 피와 살로 된 육체인 동시에 금속과 전기 신호로 된 몸이기도하다. 몸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를 불러왔다. 그러므로 여전히 메를로 퐁티의 가정은 유효하다.
원격현전이란 '비디오 카메라가 장착된 로봇을 원격 조종하여 건물 감시와 같이 인간 사용자의 현전이 요구되는 과제를 수행'하는 기술을 말한다. 기술의 범위를 조금 확장하고 일반화한다면, 우리는 원격현전을 대리 몸을 이용하여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 확장된 원격현전의 개념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가상공간들의 토대를 설명하고 있다.
몸으로 공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온라인 게임 속의 판타지 공간을 생각해보자. 유저는 게임 속 가상 캐릭터인 아바타를 원격조종함으로써 가상공간을 경험한다. 온라인 게임의 가상공간은 아바타가 우리의 육체를 대체하고 의식의 경계가 3차원이 아닌 디지털 코드들의 연쇄들과의 접점들로 옮겨갈 때 나타난다. 메를로 퐁티처럼 말해보자면, 게임 속 가상공간은 우리의 또 다른 육체, 아바타가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사회와 관계하는 방식인 것이다. 온라인 게임은 공간이 몸과 세계를 매개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서 등장하게 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원격현전은 또 다른 몸에 대한 상상이다. 다른 몸은 다른 공간을 수반한다.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몸과 공간의 관계를 성찰하게 해준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비루한 인형극 예술가 크레이그 슈바르츠가 생계를 위해 취직한 직장에서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통로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슈바르츠는 자신의 몸이 속한 황폐한 뒷골목의 세계를 떠나 인형들이 속한 예술의 세계로 침잠하기를 즐기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슈바르츠에게 존 말코비치로 통하는 통로는 비참한 자신의 육체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몸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존 말코비치라는 새로운 몸을 통해 슈바르츠는 거리가 아닌 무대라는 공간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일시적으로 '존 말코비치가 됨'으로써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삶을 즐기고자 하는 것은 슈바르츠만이 아니다. 슈바르츠는 이 사실을 부인과 회사 동료인 맥신에게 알리고 상업적 수완이 좋은 맥신은 이를 이용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간다. 사업의 번창이란 수요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그만큼의 수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영화배우로서의 존 말코비치는 '육체의 아이콘'으로서 '스타'를 상징하며, 슈바르츠의 경험은 스타의 완전한 육체를 탐닉하는 관객의 '영화 보기'경험에 대한 은유이다. 슈바르츠와 맥신이 존 말코비치로 통하는 통로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영화 보기의 경험과 대리 몸의 경험을 관련시킨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영화에 몰입되는 경험, 주인공에 동일화하는 관객의 경험 역시 일종의 원격현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주인공의 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공간 역시 일종의 가상공간이 아닌가? 영화 속의 공간은 별 볼일 없는 육체로 지루한 공간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스타라는 완전한 몸이 약속하는 환상적인 가상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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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속적인 인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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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몸으로 공간을 상상하다 – 상상, 한계를 거부하는 발칙한 도전, 임정택,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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