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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소망, 이야기

신화나 동화의 이야기가 고립된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경계 넘어서기'임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스와 같은 그리스의 영웅들은 폴리스의 시민이 아니었다. 영웅이란 법의 테두리에 거주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의 터전인 시민사회를 넘어서 죽음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들이었으며, 죽음의 세계로부터 다시 삶을 길러내는 존재들이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세계의 수많은 영웅 신화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형식적 구조를 통해 삶과 죽음의 접점으로서 이야기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화 속의 영웅들은 죽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괴물들을 처단하고 여신과의 결혼을 통해 우주적 합일의 상태에 이른다. 여신과의 결합 이후 영웅들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가져온 전리품을 인간들의 세계에 풀어놓음으로써 세계를 이롭게 한다.

캠벨의 해설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의 세계에서 우주와의 초월적인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죽음에의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전리품을 얻어 다시 삶의 공간으로 돌아오려는 삶의 의지이다. 한국의 전통 설화인 〈바리데기〉 이야기는 캠벨이 말한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신화적인 공간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바리데기〉 설화에서 바리공주는 병든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무장신선의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세계를 지나 신선세계로 여행한다. 그곳에서 바리공주는 불사약을 얻는 대가로 무장신선과 혼인해 아들 일곱을 낳는다. 이후 바리공주는 불사약을 들고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와 죽은 아버지를 되살려 낸다.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진행된다. 하지만 삶의 복원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는 처음과 끝의 사이에 놓여 있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분출한다. 이야기는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삶을 끊임없이 갱신한다. 이야기에는 삶을 위해 죽음을 거쳐 가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존재 하는 것이다.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가정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람들을 죽음의 무차별적인 심연으로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래를 견뎌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에게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틀어막을 것을 명령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선체에 꽁꽁 묶어 사이렌의 시험을 견뎌 낸다. 죽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서 다시 삶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신화 속 영웅의 사명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삶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결말을 준비하지만, 동시에 그 결말은 끊임없이 지연된다. 우리가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는 쾌감은 결말이 주는 안정감에 있는 동시에 끝없는 지연이 주는 긴장감에도 있다. 이야기에 투사된 우리의 욕망은 삶에의 욕망인 동시에 죽음에의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인용문
샤푸리 야르 왕은 왜 처녀들을 계속 죽였을까?

매일 밤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왕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아라비안나이트》속 주인공인 세헤라자데는 삶과 죽음의 긴장 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직조해내는 이야기꾼의 전형이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샤푸리 야르 왕이 왕비와 후궁들이 다른 인종의 노예들과 난교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생긴 왕의 정신병에서 시작된다. 여성의 정조에 대한 불신에 흽싸여 왕비와 후궁들을 모조리 처형한 샤푸리 야르 왕은 매일 밤 자신과 동침한 처녀들을 죽이는 괴벽이 생겨 3년간 왕국 내의 모든 처녀가 희생된다. 왕에게 매일 밤 처녀를 바치는 임무를 가진 대신은 더 이상 처녀가 남아 있지 않자 결국 자신의 딸 세헤라자데를 왕의 침실로 들여보낸다. 세헤라자데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매일 밤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된 왕은 다른 날에도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녀를 계속 살려두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천 일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들이 결국 왕의 괴벽을 치료한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샤푸리 야르 왕이 목격한 난교 장면은 자신의 가정과 왕국의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였다. 당시의 아랍 사회에서 계급과 인종의 위계적 분할은 삶의 터전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원리였다. 반면 서로 다른 계급과 인종이 융합되는 난교는 곧 삶의 질서에 대한 모독이었다. 따라서 샤푸리 야르 왕이 그날 이후 모든 여성을 혐오하게 되는 것은 삶을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과 왕국을 보호하려는 반작용이다.

하지만 《아라비안나이트》의 서술에 따르면, 샤푸리 야르 왕은 난교를 목격한 바로 그 순간 그들을 처단하지 않았다. 그는 난교가 끝나고 노예와 왕비가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불륜 장면을 홈쳐본다. 왕이 난교 장면에서 순전히 혐오감만을 느꼈다면 그는 명백한 증거가 확보된 순간 그들의 행위를 중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불륜을 홈쳐보는 장면에서, 삶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샤푸리 야르 왕의 의지는 순간적으로 마비되어 버린 듯하다. 그가 난교에서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혐오와 공포 이상의 것이다. 왕은 어쩌면 난교가 불러 일으키는 죽음의 충동에 매료되어서 삶을 다시 되돌려놓는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죄인들을 처단한 이후에도 샤푸리 야르 왕이 계속해서 처녀들을 살해했다는 사실 또한 그의 집착이 삶의 회복으로 향해 있기보다는 죽음의 재연에 고착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처녀들을 반복적으로 처형하는 행위는 아내의 부정을 정화하는 행위이기보다 삶의 공간에서 금지된 원초적 장면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이다. 왕은 3년 동안 처녀들의 부정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어느 날 자신이 죽음의 세계를 통해 느꼈던 쾌감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으로의 회귀와 죽음에의 집착 사이에서 병을 얻은 샤푸리 야르 왕에게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치료의 수단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로 인해 왕은 더 이상 처녀를 죽이지 않게 되었는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들이 처녀의 처형을 대신해서 죽음의 세계를 현실 속으로 불러냈기 때문이다. 사실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인간과 마신들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캠벨이 해설한 영웅 신화의 구조와 유사한 것들이다.

신드바드가 일곱 번씩이나 인도양에 나아가 갖가지 위난을 극복한 끝에 바그다드의 부호가 되는 〈바다의 신드바드 이야기〉는, 〈바리데기〉 설화와 같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는 바다라는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값진 전리품들을 삶의 세계로 가져오는 이야기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들은 샤푸리 야르 왕에게 있어 너무 매혹적이기에 너무 위험한 것이었던 죽음에의 충동을 다시금 삶의 풍요와 재활성을 위한 바탕으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삶과 죽음을 화해시킴으로써 왕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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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택 집필자 소개

연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콘스탄츠 대학교에서 독문학과 매체사회학을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미디어아트연구소를 설립하여 인문학이 적대시해왔던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펼쳐보기

출처

상상, 한계를 거부하는 발칙한 도전
상상, 한계를 거부하는 발칙한 도전 | 저자임정택 | cp명21세기북스 도서 소개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속적인 인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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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상상, 한계를 거부하는 발칙한 도전, 임정택,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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