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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제국주의의 팽창이 빚어낸 큰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WWI발생 | 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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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918년 |
아프리카에서의 충돌 위기를 모면한 유럽의 강호들
15세기 말, 신항로 개척 이후 무역 활동에 열을 올리던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동안 아프리카 진출의 장애 요소였던 말라리아 퇴치법이 개발되고, 리빙스턴이나 스탠리 같은 탐험가들이 대륙의 내부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사정을 본국에 알리자,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계획을 진행시킨 나라가 바로 영국과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부터 점령하고, 사하라 사막과 적도 부근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튀니지와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차지한 뒤에는 넓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실시하였다.
영국은 1875년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사들인 뒤, 이집트를 보호국(보호 조약에 따라 외교, 군사 등에 관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고 있는 나라)으로 만들었다. 또 남아프리카를 장악한 뒤에는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다 보니 동서로 진출하던 프랑스와 남북으로 확장하던 영국은 1898년에 수단의 파쇼다(지금의 코도크)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쇼다를 먼저 차지한 프랑스가 독일 세력의 진출을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프랑스와 영국은 나일 강과 콩고 강 유역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 협상을 체결하여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렵 독일은 빌헬름 2세가 즉위하여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요충지 모로코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프리카 횡단 계획을 추진하던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영국과의 협상으로 모로코가 프랑스의 세력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군대를 앞세워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영국이 강력하게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독일은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나 추진했던 모로코 진출에 실패하고 유럽에서 더욱 고립되고 말았다.
삼국 동맹 VS. 삼국 협상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이미 유럽의 여러 국가는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고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러시아와 삼제 동맹(1873년)을 체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 인해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러시아 대신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다시 삼국 동맹(1882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에 독일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삼국 협상을 체결하며 삼국 동맹에 맞섰다.
세계 대전의 예고편, 발칸 전쟁
독일은 모로코 진출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을 노렸다. 철도 부설권(다리, 철도 따위를 설치할 권리)을 차지하여 ‘베를린→비잔티움(이스탄불)→바그다드’를 연결하고, 이란으로 진출하려고 한 것이다(3B 정책). 그러나 이 정책은 영국의 ‘카이로→케이프타운→캘커타’를 연결하려는 정책과 정면으로 부딪쳤다(3C 정책). 또 독일은 식민지 건설에 있어 경쟁국이었던 프랑스와 러시아와도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 이와 같은 유럽 국가들의 갈등이 드러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발칸 반도였다. 발칸 지역은 여러 민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 중 게르만 계와 슬라브 계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오스만튀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19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자 여러 곳에서 독립을 하려고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발칸 반도는 여러 민족이 섞여 있는데다 종교 문제까지 얽혀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유럽의 화약고’ 였다.
1908년 투르크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먼저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독일에게 밀려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의 병합을 추진하였다. 그 지역에 살던 세르비아 계가 이를 거부하는데도 오스트리아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합병을 진행시켰다. 그러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결정하고, 남슬라브 인들에게 그 전쟁에 함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1912년 세르비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그리스와 발칸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투르크와 정면 승부에 나섰다(1차 발칸 전쟁).
이 전쟁에서 러시아와 동맹국들이 승리를 하였지만, 영토 배분 과정에서 분쟁이 생겼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가 차지한 영토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세르비아는 그리스와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와 전쟁에 들어갔다. 이때 몬테네그로·루마니아가 세르비아 측에 합세하자, 결국 불가리아는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불가리아는 전쟁에 참가한 각국에 인접하고 있는 자국의 영토를 모두 분할해 주고 말았다(2차 발칸 전쟁).
그 무렵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영국과 손을 잡고 투르크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 결과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팽팽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벌어질 더 큰 전쟁의 불씨를 키운 셈이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터진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보스니아는 1908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각주1) 의 영토가 된 곳이지만, 그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벗어나 세르비아에 속하길 원하고 있었다.
황태자 부부가 방문한 날은 세르비아에서 민족 행사가 있는 기념일 이었다. 그런 날에 지배국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보스니아를 방문한 것이 세르비아인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황태자 부부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대학생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황태자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것이다. 선전 포고 소식을 접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자국과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느라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전쟁이 확산 되는것을 막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길은 끝내 잡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7월 29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공격했다. 러시아가 바로 군대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에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8월 1일,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8월 3일에는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해 독일을 공격하면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동안 전쟁을 막아 보려고 애쓰던 영국은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이 주도권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8월 4일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05년에 당시 독일군참모 총장 슐리펜 백작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 러시아와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 상황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러시아 군이 독일 동부 지역까지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동부에서는 최소한의 방어전으로 러시아 군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대신,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서부 전선에서 신속하게 전투를 마감해야 한다는 작전을 세워 두었다. 그의 계획대로 전쟁은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동부 전선과 프랑스를 상대로 하는 서부 전선, 두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참호전으로 맞서는 영 · 프 연합군과 독일군
슐리펜에 이어 독일 참모 본부를 지휘하던 몰트케는 슐리펜의 작전대로, 8월 1일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사흘 만에 벨기에까지 공격하였다. 7개 군병력이나 투입한 독일의 계획대로라면 6주 안에 프랑스를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벨기에가 워낙 강력하게 방어를 하는 바람에 벨기에를 통과하기까지 무려 12일이나 걸리고 말았다.
프랑스 군 총사령관 조프르 장군은 5개 군을 독일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독일군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적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막강하게 밀려오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한 채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군이 파리 근처 마른 강까지 진격해 오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조프르 장군은 영국군과 함께 반격하기 시작했다.
마른 강까지 오는 동안 계속되는 전투에 지친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1군과 2군사이의 연락이 끊어졌다. 게다가 예상보다 러시아의 진군속도가 빨라 1개 군만 투입했던 동부 전선 상황이 불안해지자, 독일의 몰트케는 타넨베르크로 일부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힘든 상황을 견지지 못한 독일군은 9월 11일, 엔 강(프랑스 북동부 샹파뉴아르덴 지방 아르덴 주에 있는 강)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짧은 기간에 프랑스를 점령하겠다는 독일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독일군은 참호(전쟁터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파고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5년 동안 대치하였다. 이로써 양측 모두 전력 손실이 너무 커 정면 승부는 어려워졌다. 이제 전쟁은 장기전으로 들어섰다.
동부 전선 타넨베르크 전투
독일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군은 선전 포고를 한 지 2주 만에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역에 집결했다. 제1군과 2군, 총 9개 군단과 7개 기병 사단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은 타넨베르크(독일 동북부 국경 지역으로 지금의 폴란드 스텡바르크)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처음 슐리펜 작전대로 제8군과 예비군병력만을 배치하고 있었다. 전력상 우위에 있던 러시아 군참모 본부는 1군과 2군의 합동 작전으로 독일 8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뒤 러시아 군은 빠른 속도로 서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역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러시아군이 승세를 잡아 독일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지휘 본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러시아 군의 전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1, 2군은 합동 작전을 펴지 못한 채 따로 움직였고, 병력의 일부를 발트 해 연안으로 배치하는 바람에 공격력도 약해진 것이다.
그 사이 독일군은 당초 예상보다 러시아 군이 강세를 보이는데 놀라 퇴역한 힌덴부르크 장군을 사령관으로 불러들이고, 서부 전선에 투입됐던 병력을 일부 이동시켰다. 힌덴부르크는 이미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호프만 중령이 세운 계획을 그대로 수행하여 러시아 군을 격파하였다. 호프만은 당시 러시아의 1군과 2군의 간격이 벌어져 서로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에 병력이 이동할 때에는 충돌을 최대한 피하다가 기회를 봐서 러시아 2군을 총 공략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9월 중순까지 러시아 군을 동프로이센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독일은 러시아에 밀려 퇴각하던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폴란드 서부로 보냈다. 그곳에서 만난 독일과 러시아군은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도 밀리고 있었다. 처음에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침공에 성공했던 오스트리아 군은 강력하게 대항하는 세르비아 군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해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오스만 튀르크의 참전
전쟁이 시작된 뒤 오스만 제국은 독일이 러시아 군대를 막아 줄 거라고 판단하고, 독일의 동맹국에 합류했다. 독일 전함이 다르다넬스 해협(흑해와 에게 해를 연결하는 통로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에 경계를 이루는 해협)에 도착하자, 독일과 투르크 연합군은 영국 선박들을 억류하면서 러시아 항구들에 대한 포격을 시작하였다. 이를 본 러시아는 11월 1일 투르크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였고, 연합국들도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동부 유럽 카프카스 지역에 있는 내륙 국가)와 아제르바이잔(카프카스 동부, 카스피 해 서부 연안에 있는 국가)에서 투르크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러시아는 사라카미스 전투에서 크게 패해 잠시 진격을 멈췄다. 그러나 다시 반격하여 투르크 령 아르메니아에 대한 총공격에 성공하여 인근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영국은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가는 투르크의 항구 바스라를 점령하고, 바그다드로 향했다. 그렇지만 투르크 군의 포위 공격에 밀려 후퇴 하고 말았다. 이집트 전선에서도 대규모 공세로 투르크 군의 전초 기지를 점령했지만 역시 철수하고 말았다.
서부 전선에서의 치열한 싸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프랑스·영국·벨기에·이탈리아 연합군은 독일 동맹군에 대해 총 공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그러나 독일의 방해로 영국만이 그 작전을 제대로 수행했다. 이를 본 독일은 서부 전선 전체에 병력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몇몇 중요한 지점에 집중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베르됭(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있는 도시) 주변에 있는 참호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약 6개월에 걸쳐 프랑스군의 참호를 공격한 끝에 초토화시켰다. 전력을 보강한 프랑스군은 그 해 10월 다시 반격을 시작하여 12월에는 베르됭을 탈환하였다.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길고 격렬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유명한 베르됭 전투이다.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영·프 연합군은 솜 강 부근에서 반격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신무기인 탱크를 동원했지만, 독일군은 참호 속에 들어가 기관총만 쏘아 댔다. 여기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자 연합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결국 솜 강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60만이 넘는 군인이 사상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연합군측은 비록 이 전투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독일군 주력 부대를 서부 전선에 묶어 놓는데는 성공하였다.
이탈리아는 왜 연합군으로 참전했을까?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이었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영토 일부를 줄 테니 참전하라고 이탈리아를 설득했다. 이에 비해 연합국에서 전쟁이 끝나면 북부 이탈리아 지방과 독일·오스트리아의 해외 식민지까지 주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이 제안에 넘어가 연합군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
전쟁 당시 독일은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해전에서 크게 싸우는 일은 많지 않았다. 1914년 8월, 영국은 독일의 헬골란트 섬 부근에서 독일 함선들을 파괴시킨 뒤 북해를 봉쇄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했다. 독일군 함대가 12월에 영국의 해안에 포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다음 해 1월 독일은 다시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움직였지만, 무선 통신 암호를 해독한 영국 해군에 의해 도거뱅크에서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에 독일 황제는 더 이상 영국을 상대로 해상에서 싸우는 것은 무리라 여기고, 독일 해군을 모두 불러들였다.
1916년 5월 31일, 마침내 영국과 독일의 해군은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독일 함대가 포격을 퍼붓자, 타격을 입은 영국군정찰 함대는 주력 함대 쪽으로 후퇴했다. 독일 함대가 계속해서 영국군을 추격하였고, 두 나라의 주력 함대가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유틀란트 해전). 독일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았고, 영국은 북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양국은 서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어찌 되었든 유틀란트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양측이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해전이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독일은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들어갔다. 북해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그 해역을 지나는 모든 선박에 대해 경고 없이 무차별로 공격한 것이다. 그 해 3월, 독일의 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대가를 받고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데 쓰는 배)이 침몰당해, 많은 미국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자 4월 6일, 그동안 경제적인 원조만 하면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로써 전쟁은 독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영향
미국이 참전하자 연합군은 영국을 중심으로 다시 반격을 펼쳤고,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는 1917년 3월에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물러나고, 레닌 중심의 혁명 정부(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쟁에서 빠졌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합군측은 계속 승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1918년 9월,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패한 불가리아가 항복하면서, 동맹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항복한 지 한 달 뒤 투르크도 항복했고, 11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마저 항복하고 말았다.
같은 날 독일에서는 군항인 킬에서 수병들이 출항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여파가 커지면서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빌헬름 2세가 물러나고, 더 이상 전쟁을 치르기 어려워진 독일은 11월 11일에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 동안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서 처음 등장한 잠수함, 항공기, 탱크, 대공포, 독가스, 기관총 등 각종 신무기들로 인해 전사자만 9백만 명이 넘었다.
전쟁 후 연합군 측은 파리 강화 회의를 열어 참전국들의 이해관계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후 세계 질서의 기본 원칙에 관한 14개 조항을 주장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에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맹각주2) 이 창설되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었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또 패전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생제르맹 조약으로 인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해체되었고, 영토가 예전의 10분의 1로 줄었다.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영토의 반 이상을 내놓아야 했다.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1923년에 지금의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책임을 물린 것과 승전국에 속하면서도 보상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 문제는 더 큰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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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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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제1차 세계 대전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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