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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유럽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독일의 통일 전쟁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
발생 | 18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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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871년 |
프로이센, 통일을 염원하기까지
오늘날 독일 지역의 역사는 481년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 왕국의 문을 연 메로빙거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궁재 피핀이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이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751년). 그의 아들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면서 새로 얻은 변방 지역에 ‘마르크(Mark)’각주1) 를 설치했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843년에 베르됭 조약에 의해 서 프랑크·중 프랑크·동 프랑크로 삼분(三分)되었다. 이들은 각각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962년 동 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아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의 문을 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7세기에 이르러 30년 전쟁(1618~1648년)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결국 300여 개의 독자적인 영방 국가(각각의 제후들이 독립된 나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중 브란덴부르크 마르크에서 출발한 호엔촐레른 왕가는 1701년 선제후에서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하였는데, 이때 첫 국왕으로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였다. 그 뒤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은 프로이센(호엔촐레른 왕가)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로 이원화되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이던 오스트리아에 맞서 대립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 때 절대 왕정(군주가 어떠한 법률이나 기관에도 구속받지 않는 절대적 권한을 가지는 정치 체제)을 수립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년)과 7년 전쟁(1756~1763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프로이센은 드디어 유럽 최대의 군사력을 지닌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804년에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1세는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영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라인 연방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그동안 명목만 유지해 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프란츠 2세 시대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여러 차례의 대불 동맹에 참여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1세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틸지트 조약(1807년)에 의해 영토의 반을 잃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자, 프로이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해방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퇴각하게 되었고, 유럽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빈 체제(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중심)가 성립되었다. 독일은 35영방과 4자유시로 구성된 독일 연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이때 프로이센은 작센 지방의 5분의 2를 얻고, 베스트팔렌 지방과 라인 강 왼쪽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추가로 보상받았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대국(국력이 강하거나 국토가 넓은 나라)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새로이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다.
독일 제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빈 체제는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보수 반동(진보적이거나 발전적인 움직임을 반대하여 강압적으로 가로막음) 체제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프로이센에서는 자유주의가 후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 결과 1817년 독일 지역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부르센샤프트를 결성하고, 빈 체제를 반대하면서 자유주의적 통일을 열망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메테르니히의 탄압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베를린과 빈을 비롯한 독일 지역의 모든 영방에서도 자유주의 민족 국가를 쟁취하려는 3월 혁명이 일어났다. 3월 혁명의 결과 메테르니히가 실각(일에 실패하여 있던 지위에서 물러남)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왕은 언론·집회의 자유와 새로운 의회 성립,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영방 국가들의 대표들은 1848년 5월 18일에 프랑크푸르트암마인(독일 헤센 주에 있는 도시)에서 독일 국민 의회를 열어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제정했다. 다음 해 3월에는 ‘독일국 헌법’(신헌법)을 의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통일 문제에 있어서 대독일주의(오스트리아 제국을 포함시켜 그 지도 아래 독일 통일을 실현하려 한 사상)와 소독일주의(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을 실현하려고 한 사상)가 서로 팽팽하게 맞서는 바람에 결국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결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프로이센은 재정경제학자 리스트의 “영국 상품과의 경쟁이 어려운 독일의 현 상황에서는 국내의 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새로운 조세 제도를 도입하여 보호 무역주의를 채택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1818년, 독일 영방 내의 모든 관세(세관을 통과하는 화물에 대하여 부과되는 조세. 수출세·수입세·통과세 세 종류가 있음)를 폐지하겠다는 뜻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프로이센의 노력은 10년 뒤 프로이센과 헤센다름슈타트 공국과 처음 관세 동맹을 체결하면서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고, 독일 내 여러 영방들도 서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각각의 영방 국가들끼리 개별적으로 맺었던 관세 동맹은 1834년에 이르러 독일 관세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이 동맹의 결과 독일은 영국 상품에 대한 방어와 함께 화폐 단일화, 독일 내 영방 국가들 사이의 관세 폐지, 상업 정책 통일 등을 추구하여 경제적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1854년 프로이센은 관세 동맹의 확대를 주도하였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등장
1861년 프로이센에서는 빌헬름 1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직업 군인 출신이었던 그는 상비군 병력을 증강하고, 민병대를 폐지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에 다수파를 이루던 자유진보주의자들이 민병대 제도를 문제로 군국주의(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의한 대외적 발전에 두고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국민 생활 속에서 최상위에 두려는 정치 체제) 보수 세력과 충돌하자, 빌헬름 1세는 1862년에 전형적인 융커각주2) 출신인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강력한 군주 정치를 내세운 비스마르크는 수상 자리에 오르자, ‘지금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과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 단독으로 군제(군을 건설·유지·관리·운용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제도)를 개혁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무력 통일 정책(철혈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3년 독일 연방의 개혁과 통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독일 전체 영방 군주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연방 회의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민 대표 기관을 설립하자는 새로운 연방 개혁 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이 개혁안에 독일 내에서의 프로이센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인구 비례에 의한 대표자 선출각주3) 을 구실로 오스트리아를 견제했다. 결국 프로이센이 불참하면서 군주 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7주 동안 벌어진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
이렇게 팽팽하게 대립하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슐레스비히·홀스타인 문제로 인해 결국 전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은 모두 공작(다섯 등급으로 나눈 귀족의 작위 가운데 첫 번째 작위)이 다스리던 땅으로, 덴마크와 독일을 잇는 접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모두 덴마크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863년 덴마크의 새로운 국왕 크리스티안 9세가 독일 연방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을 자기 나라 영토로 병합해 버렸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두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두 나라는 이들 지역을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두 지역의 분할을 요구하고 나서자, 1865년 8월 13일 가스타인 조약을 맺고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에, 홀스타인은 오스트리아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 같은 결정에 동의한 것이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독일 연방의 통일을 위한 대비책으로 다양한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이탈리아는 군사 동맹국이어서 걱정이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러시아는 예전 크림 전쟁 때 오스만 튀르크 연합군에 가담하여 자신들을 압박한 오스트리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 영국은 프로이센과 덴마크 전쟁 때에도 간섭하지 않았던 점을 보아,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의 조카)는 멕시코 원정(1861~1867년. 미국 항의로 군대 철수)의 실패로 인한 국내 비판 여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 두 나라의 힘이 약화되면 라인란트(프로이센 령 라인 주, 독일 중서부의 라인 강 연안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속셈을 꿰뚫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비아리츠에서 나폴레옹 3세를 만났다. 그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할 때,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 준다면 서운치 않게 보상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보상이 라인팔츠(라인 강 서쪽 연안) 지역의 양도일 것이라고 생각한 프랑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한편,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져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오스트리아와도 비밀 조약을 맺어 두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면 베네치아를 양도하는 대신, 라인 강 주변 지역을 프랑스 보호령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말로만 성립되고 서류로 작성되지 않았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이유가 되었다.
독일 연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프로이센의 시도가 오스트리아에 의해 계속 저지당하자, 1866년 봄 비스마르크는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결심하고 준비에 나섰다. 같은 해 6월 17일, 오스트리아가 먼저 선전 포고를 하고 다음 날 바로 프로이센이 대응하면서 마침내 전쟁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8월 23일,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기까지 걸린 기간이 7주라고 해서 ‘7주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에스파냐 국왕 선출 문제를 둘러싼 대립
오스트리아를 제압한 프로이센은 마인 강(독일 라인 강의 가장 큰 지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나라는 당연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에게 당초 비아리츠에서 약속한 것을 지켜 줄 것을 요구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는 독일 연방 중 하나이면서 네덜란드 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룩셈부르크를 매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방해 공작으로 런던회의에서 다른 열강들이 룩셈부르크를 영세 중립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프랑스가 강력히 반발하자,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에 주둔해 있던 프로이센 군을 철수시켜 프랑스를 달랬다.
이 무렵 프랑스는 국제적으로도 고립 상태에 빠졌다. 영국은 프랑스 견제를 위해 프로이센이 더 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 문제를 두고 나폴레옹 3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 러시아는 비스마르크가 크림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흑해에서의 비무장화 조약을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동맹 제의를 거부했다.
이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의했으나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복구에 힘을 쓰는 한편, 자국 내에서 봉기한 헝가리 인(마자르 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발칸 반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동맹으로서 함께하는 조건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로마 문제로 갈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와 동맹을 추진할 수 없는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랑스의 동맹 제의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더 이상 유럽에서 프로이센의 입김이 세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의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에스파냐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868년 부르봉 왕가(프랑스 측)의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낸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의 사촌인 레오폴트 대공에게 새로운 왕위를 제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가 레오폴트 대공을 설득하여 왕위를 받아들이게 했다. 완전한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던 비스마르크도 프랑스를 자극하기 위해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이다.
1870년 6월 21일에 에스파냐가 그 사실을 발표하자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프로이센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면서 레오폴트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자 처음부터 왕위 수락을 반대했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왕위 수락을 접고 말았다.
이 무렵 프랑스의 프로이센 주재(직무상 파견되어 한 곳에 머물러 있음) 베네데티 대사가 레오폴트 대공의 에스파냐 왕위 포기에 대해 확답을 받기 위해 엠스 온천(독일 헤센 나사우에 있는 온천)에서 휴양 중인 빌헬름 1세를 방문했다. 이때 그들이 나눈 회담의 내용은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전쟁에 나서게 하기 위해 그 전보 내용을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바꾸어 7월 14일에 영국 신문에 발표해 버렸다. 또 베네데티가 벨기에 병합을 거론한 문서까지 몰래 《런던 타임즈》에 제공했다(엠스 전보 사건).
그 결과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프로이센 국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급속도로 커졌고, 프랑스 국민들 역시 프로이센에 대해 격분하게 되었다. 전쟁을 원하는 비스마르크의 의도를 읽은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먼저 선전 포고를 하고 나섰다. 그러자 프로이센도 방어 전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프랑스를 향해 전쟁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1871년 5월까지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 전쟁)’각주4) 이라고 한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의 과정
이미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뿐 아니라 남독일 국가들의 지지까지 얻어 더욱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과 싸웠다.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이 서쪽으로 진군하자, 라인 지방에 있던 프랑스의 바젠 장군도 13만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해 대항했다. 8월 16일, 바젠의 군대는 마르스라투르 동쪽 비옹빌 근처에서 프로이센 군에 차단당한 채 대규모 기마 전투를 벌였다. 다음날 바젠은 메츠(오늘날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 모젤 주의 주도) 서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라블로트 근처에 있는 언덕까지 군대를 철수시킨 뒤, 공격해 오는 프로이센 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은 2만이 넘는 군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그것도 잠시 바젠 장군이 반격을 서두르지 않자 프랑스 군대는 곧 수세(적의 공격을 맞아 지키는 형세나 그 세력)에 몰려 메츠로 후퇴하였다. 몰트케는 일부 병력을 이용해 바젠 장군의 부대를 메츠에 가두어 두었다. 그런 상태로 54일 동안 갇혀서 버티던 바젠 장군의 부대는 결국 프로이센 군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그 무렵 프랑스의 마옹 장군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메츠에 갇힌 프랑스 군을 구해 내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그렇지만 이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몰트케는 작센의 알브레히트 황태자가 이끄는 부대를 보내 프랑스 군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마옹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 채 스당 요새(프랑스 동부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뫼즈 강 연안의 프랑스 국경에 있는 요새)로 후퇴하였다. 이때 몰트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태자가 이끄는 프로이센 제3군을 움직여 스당을 완전히 포위했다. 1870년 9월 1일, 마옹 장군이 다치면서 프랑스 군의 지휘 체계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프로이센 군대는 포병 부대를 앞세워 스당 요새에 포격을 퍼부은 뒤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8만이 넘는 병사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어 항복을 하였다(스당 전투).
프로이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해 9월 19일에는 마침내 파리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쟁 포로로 붙잡힌 황제를 폐위시키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파리를 방어하는데 주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1월 28일까지 강력하게 저항하던 프랑스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1871년 5월 18일 프로이센은 티에르가 주도하는 프랑스 임시 정부와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배상금 50억 프랑과 함께, 과거 베스트팔렌 조약(30년 전쟁 후 맺은 조약)으로 프랑스에 넘어갔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다시 넘겨 받게 되었다.
독일 제국 선포와 성장
파리가 함락되기 전 1871년 1월 18일에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즉위식을 갖고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시대부터 나뉘어 있던 왕국과 대공국, 공국, 자유 도시들이 하나로 통일된 최초의 단일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도이치랜드(독일)이다.
독일 제국 건설의 1등 공신이었던 비스마르크는 그대로 통일된 독일 제국의 재상이 되어, 정치, 문화, 종교를 강력히 통제하면서 통일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독일을 세계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임시 정부가 알자스·로렌 지방을 넘기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1871년 3월 티에르의 임시 정부를 몰아내고 ‘파리 코뮌’각주5) 이라는 자치 정부를 세워 세계 최초로 노동자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임시 정부가 이들을 진압하자,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중심제인 제3공화국(1870~1940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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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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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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