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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
페르시아 전쟁
발생 | 기원전 4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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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기원전 479년 |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는 페르시아
기원전 671년 오리엔트를 처음 통일한 나라는 아시리아각주1) 였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 후 기원전 612년에 이르러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주요 도시인 아슈르와 니네베가 차례로 함락 당했고, 통일한 지 30년 만에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제국의 멸망 후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 강 삼각지)까지 넘보았다. 이 무렵 신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지금의 이란 남부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아케메네스 왕가의 키루스(키루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에 대항했다.
그의 아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50년에 메디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때를 가리켜 서기 3세기 초에 등장하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구분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라고 부른다.
이후 키루스 2세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점차 소아시아 해안 지대까지 세력을 넓혀 그리스 도시들도 손에 넣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제3대 왕인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2~기원전 486년 재위) 시대에는 인더스 강에서 에게 해 북쪽 트라케에 이르는 지역까지 정복하여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제국의 주인이 된 다리우스 1세는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전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정비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면서 제국내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여 상업을 발달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전국을 20여 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직접 파견하였고, 속주의 여러 민족에게는 그들의 언어와 종교 등 고유한 풍습을 존중하는 관용 정책을 펼쳐 정복한 지역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겨냥한 까닭
그러나 문제가 되는 지역도 있었으니, 바로 소아시아(아나톨리아. 현재 터키의 아시아 지역을 이루고 있는 반도) 지역이었다. 일찍이 페르시아 왕국의 문을 연 키루스 왕 시대에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아시아 서쪽 지중해 연안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지방의 옛 이름)를 정복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하나 둘씩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바다와 가까운 이오니아 정복을 위해 새 수도 파르사(오늘날 파르스. 그리스 인들은 이를 ‘페르세폴리스’라 부름)를 건설하였다. 지중해로 세력을 확대하려던 다리우스 1세의 꿈은 당시 이오니아의 폴리스각주2) 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룰 수 있었다. 특히 그 지방에서 가장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던 밀레투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이오니아 지방 전체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 다리우스의 군대가 스키타이(기원전 6~기원전 3세기에 남부 러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활약한 기마 유목 국가)에게 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이때를 노려 다리우스 1세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 당시 이오니아의 중심이었던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에 무장 지원을 요청했고, 기원전 498년에 그리스 본토의 에레트리아, 아테네 양국이 지원군을 보내왔다. 이 일에 분노한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492년에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려는 원정에 나섰다. 이때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계속된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 이다.
1차 전쟁-하늘이 도운 그리스
기원전 492년 총사령관인 마르도니우스(다리우스 1세의 사위)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육·해군은 헬레스폰투스(터키 북서부의 좁은 해협. 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에 모여, 그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육군은 마케도니아를 파괴했고, 해군은 타소스 섬을 정복했다.
이처럼 기세등등하게 진군하여 그리스 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페르시아 군을 가로막은 것은 하늘이었다. 페르시아 군은 풍랑이 심하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지나는 길에 아토스 곶(바다나 호수로 가늘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 근처에서 폭풍을 만났다. 이때 함선 300여 척이 파손되고 만 명이 넘는 군사가 물에 빠져 죽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엄청난 타격을 입은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향한 첫 번째 원정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2차 전쟁-마라톤 전투
2년 후 다리우스 1세가 보낸 제2차 원정군은 먼저 에레트리아(그리스 중부에 있던 고대 도시)를 점령한 후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군은 사모스 섬(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에서 출발하여 아테네로 직진하는 해로를 선택했다.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쫓겨난 히피아스각주3) 의 안내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라톤 평원에 이르렀다. 페르시아 군이 이곳을 싸움터로 잡은 것은 마라톤의 넓은 평원이 페르시아의 기병이 싸우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이 사실을 스파르타에 알리고, 힘을 합해 침략자와 싸우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당시 아폴론 신전에 제사를 지내는 기간인데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아테네는 1만 명의 자국 병력만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서야 했다. 이때 아테네 군을 도와준 것은 플라타이아이(코린트 만의 동북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보이오티아 지방에 있는 넓은 지역)에서 온 1,000명의 지원군뿐이었다.
아테네의 군사 규모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거의 3배나 차이가 나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아테네 군의 밀티아데스 장군은 방어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다. 그 당시 전쟁에서는 진(군사들의 대열을 배치한 것)의 중앙에 강한 주력 부대를 먼저 배치하고, 양쪽 날개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는 반대로 진의 양쪽 날개에 강한 부대를 보내고, 중앙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했다.
마침내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면서 페르시아 군 궁수의 공격을 피했다. 처음에 페르시아 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던 아테네 군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네 군의 예상 밖의 전략에 당하게 되자, 페르시아 군은 당황하여 마라톤 평원에서 물러났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 군은 6,400명, 아테네 군은 192명이 전사하였다. 아테네의 대승이었다. 이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로 함대를 출동시켰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소아시아로 돌아갔다.
한편 마라톤 평원의 전투 결과를 걱정하며 광장에 모여 있던 아테네 시민들 앞에 달려 와승전 소식을 전한 전령이 있었다. ‘에우클레스(페디피데스라고도 함)’라 불리는 그는 아테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1.6km를 달려와, “기뻐하라.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을 전하고는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기원으로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부터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
첫째, 강한 정신력 때문이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면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에 놓일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라톤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대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속력과 승리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아테네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뛰어난 전술 때문이다.
아테네 군대는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유지했다. 이것은 그리스와 같은 산악 지형에 적합한 전투 방식이다. 이에 비해 페르시아 군대의 전술은 궁수들이 활을 쏘아 공격을 한 뒤, 기병이 적을 상대한 다음에 보병들이 마무리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넓은 평원 지형에 적합한 전술이었기 때문에 마라톤 지역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네가 공격하자 페르시아 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밀티아데스의 역배치 전술도 페르시아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3차 전쟁-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아픔을 뼈아프게 새기면서 다시 아테네 공격을 준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왕은 기원전 480년 봄 3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직접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이라서 이동 속도가 느렸다. 그 덕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30여 개의 도시 국가들은 동맹군을 조직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 맞설 준비를 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제1강국이었던 스파르타가 맡았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을 담당하였다. 테르모필라이(아테네 북서쪽 약 136km 지점에 위치한 고개)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가 지휘하는 육군이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하는 동안, 아테네가 지휘하는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격멸시킴으로써 페르시아 군 전체의 기세를 꺾는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의 좁은 길에 약 7,000명의 육군을 배치했고, 아르테미시움(그리스의 크레타 섬 다음으로 큰 섬인 에보이아 북쪽 해변에 있는 곶)에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전함 271척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한 페르시아 육군은 4일 동안 정찰을 한 뒤, 그리스 군의 세력이 대단치 않은 것을 보고는 5일째 되는 날에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많은 병력만 잃었다. 그러나 7일째 되는 밤, 그리스의 한 반역자가 페르시아 정예 부대를 좁은 길을 돌아 그리스 군의 뒤쪽으로 안내했다.
날이 밝자 페르시아 군은 일제히 그리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남은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렇게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시내로 쳐들어왔지만, 이미 아테네 시민들은 다른 곳으로 피해 있었다. 페르시아 군은 텅 빈 도시를 짓밟고 다니면서 불을 질렀다.
한편 그리스 해군을 지휘하고 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후퇴하는 척하며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키프로스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고대 도시)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하는 교묘한 전략을 펼쳤다. 마침내 페르시아 해군이 그리스의 작전에 넘어가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리스 함대의 갤리선(그리스의 전함)들이 최고 속력으로 달려와 페르시아 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며 공격을 해 댔다. 이에 당황한 페르시아 군은 배를 돌리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네 배들끼리 충돌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밤이 되어 바람이 강한 서풍으로 바뀌면서 폭풍우까지 몰아치자, 그리스 함대는 재빨리 살라미스 해협 깊숙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페르시아 함대는 폭풍우에 휩쓸려 4분의 3이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자신의 함대가 무참히 패하는 것을 본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겨울에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의 군대는 기원전 479년 여름까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에서 일어난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미칼레(사모스 섬의 미칼레 반도) 전투를 끝으로 마감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싸움은 그 뒤에도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테네가 앞장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이 이오니아에 있는 폴리스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델로스 동맹국들의 공격은 대부분 성공했고, 기원전 448년경에는 아테네를 비롯한 동맹국들과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사이에 전쟁을 마감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전쟁 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변화
페르시아 전쟁은 지중해에 세력을 넓히려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3차에 걸친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패배로 끝을 맺고 말았다. 대신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특히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며,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맹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아가 아테네는 50여 년 동안 미술, 정치, 시, 연극, 철학, 법학, 논리학, 역사,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창조력이 넘쳤던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세력이 점점 약해져, 왕권 다툼과 속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기원전 331년에 마케도니아 왕국(그리스 북쪽에 있던 고대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에게 무너져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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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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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페르시아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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