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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국가의 통일과 노예 해방을 위해
미국의 남북 전쟁
발생 | 18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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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865년 |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국가로 성장한 미국
7년 전쟁각주1) 이후 영국은 전쟁 때문에 생긴 재정적 손실을 메우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기존 정책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를 통제하고 세금을 늘리는 등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식민지 대표들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파리 조약(1783년)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고, 1789년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로 구성된 미국(아메리카 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새로운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연방파(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반연방파(주의 독립적인 권한을 유지하려는 지방분권주의)의 대립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챙겼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방해로 미국의 선박들이 나포(사람이나 배·비행기 등을 사로잡음)되는 일이 벌어지자, 다시 영미 전쟁(1812~1814년)을 벌였다. 이 전쟁 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부로의 영토 확장이었는데, 맨 먼저 1803년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후 1819년 플로리다를 차지했다. 1845년에는 텍사스를 병합(둘 이상의 기구나 단체, 나라 따위를 하나로 합침)했으며,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할양 받았다. 이로 인해 1840년대에 이미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대륙 국가로 발전하였다.
미주리 협정에서 드레드 스콧 사건까지 계속된 분쟁
미국은 크게 남부 지방과 북부 지방으로 이분화되어 발전하면서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북부의 주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한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넓은 평야가 대부분인 남부는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면화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할 당시부터 연방파(북부)와 반연방파(남부)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오던 이들은 새로 편성된 서부의 주들이 자유 주(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은 주)를 택하느냐, 노예 주(노예 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주)를 택하느냐를 둘러싸고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이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세력 확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하원 의원의 수가 결정되는데, 남부 지역의 400만이 넘는 노예들이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인구수에 포함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만약 선거법상 유리한 남부 측이 하원의석을 더 많이 차지할 경우, 북부는 세력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측 모두 노예제 폐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와 북부의 이런 숨겨진 갈등은 1817년에 미주리가 새로운 미연방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자유주와 노예 주가 각각 11개였는데, 미주리 주가 노예제를 채택할 경우 그동안 유지되어 온 남북의 세력 균형이 깨어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타협하여 미주리 협정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노예제 확대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은 해결된 듯 보였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준주(주의 자격을 얻지 못한 미국의 행정 구역)의 노예제 채택의 여부를 주민 주권론각주2) 에 맡겼다. 이로써 사실상 미주리 협정이 깨지게 되자, 남과 북은 다시 노예제 채택 문제로 맞서게 되었다. 노예제 확장으로 인한 지역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이 법안의 통과로 양측 지지자들은 서로를 공격하였다. 캔자스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져 피의 캔자스라 불리는 참극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1857년 내려진 드레드 스콧 판결로 인해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공화당이 세력을 굳히게 되자, 남북 간의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 결과 남부의 몇몇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나섰다. 이 위협은 남북 전쟁을 일으킨 결정타가 되었다.
이 무렵 1852년에 스토우 부인이 소설《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출간하여 흑인 노예의 참상을 알리는 데 한몫을 거들면서, 북부 지역 사람들은 노예제 폐지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남북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 분쟁들
주요사건 | 시기 | 내용 |
미주리 협정 | 1821년 | 미연방으로 새로 편입되는 미주리를 노예 주로 인정하는 대신, 메인 주를 매사추세츠 주에서 분리하여 자유 주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한 법안. 이후의 주 편입 때는 북위 36˚ 30′ 이남은 노예 주, 그 이북은 자유 주 지역으로 할 것도 함께 결정하였다. |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 | 1854년 5월 30일 |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2곳의 정부 조직을 주민 주권의 원칙에 따르도록 결정한 것으로, 남북 전쟁 직전 노예제 확장 문제에 관한 국가 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법. 특히 준주에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의회의 법령 보다 주민 주권 원칙이 우선함을 보여 주는 법령이다. |
피의 캔자스 | 1854년 ~1859년 | 미국의 노예제 지지론자와 폐지론자가 주민 주권론이라는 원칙을 놓고 새로운 준주인 캔자스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소규모의 내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된 후 북부의 자유 토지 지지자들은 무장한 이민 단체를 결성해 캔자스로 이주했고, 노예제 지지자들도 주 경계를 넘어 몰려왔다. 노예제 폐지론자인 한 거주민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터진 이 분쟁은, 1861년 캔자스가 자유 주로 연방에 가입하면서 끝이 났다. |
드레드 스콧 판결 | 1857년 3월 6일 | 모든 준주에서 노예 제도를 합법화함으로써 지역 간의 분쟁과 내란의 길로 치닫게 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주에 오기 전에 자유 주와 자유 준주에 살았음을 내세워 자신이 자유 신분임을 밝혀 달라는 소송을 미주리 주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대부분 남부 출신이었던 연방 대법원 판사들이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없으므로,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미주리 협정은 준주 지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 |
링컨의 대통령 당선과 아메리카 남부 연합의 대결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데 불을 붙인 것은 바로 1860년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앨라배마를 비롯한 남부의 7개 주는 대통령 취임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통령 취임 전인 1861년 2월에 미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아메리카 남부 연합’각주3) 을 조직한 후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또 남부 연합은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에 있는 섬터 요새를 먼저 공격했다. 이때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북부군이 항복의 의사를 밝히려고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 포탄에 남부군 병사가 전사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링컨은 지원병을 모집하고, 남부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이 무렵 로버트 리 대령이 북부군을 떠나 남부군에 합류하였고, 노예 주 가운데 아칸소를 비롯한 4개 주가 남부 연합에 가담함으로써 남부군은 더 큰 지지 세력을 얻게 되었다.
섬터 요새의 전투 이후 북부군은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도시)를 향해 진군하였다. 7월 21일, 불런 강(버지니아 주 북동부 머내서스에 위치)에서 남부군과 만나 최초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북부군은 ‘철벽 장군’이라 불리는 토머스 잭슨과 보러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에게 패배하여 워싱턴으로 후퇴했다(제1차 불런 전투).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런 전투에 패배한 북부군은 신병을 더 소집해서 훈련을 강화한 뒤 1862년 2월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그랜트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 군각주4) 은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공략하여 점령하고, 켄터키 주와 테네시 주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4월에는 매클렐런 장군이 다시 리치먼드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였지만, 남부군의 로버트 리 장군의 부대에 저지당했다. 매클렐런이 리치먼드 동쪽으로 퇴각하자 리 장군은 북부군을 공격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그러나 리 장군은 다시 잭슨 장군과 연합하여 존 포터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매클렐런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 군은 리치먼드 장악에 실패하고, 요크타운 반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7일 전투와 반도 회전(일정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 1862년 6월 25일~7월 1일).
링컨 대통령은 1862년 7월에 존 포프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버지니아 군’을 새로 창설하여 리치먼드 근처로 진격시켰다. 하지만 북부군은 리 장군이 보낸 잭슨의 매복 작전에 당해 패배를 하였고, 다시 워싱턴 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제2차 불런 전투, 8월 29일~30일).
2차 불런 전투에서 승리한 리 장군은 메릴랜드로 진격하다가, 앤티텀(샤프스버그)에서 재편된 매클렐런 장군의 부대와 마주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메클렐런은 리 장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리의 작전 명령서를 손에 넣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리 장군은 버지니아로 안전하게 퇴각하였다(앤티텀 전투, 9월 17일).
앤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하자, 링컨 대통령은 9월 22일에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남부 연합이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그날을 기해 남부의 모든 노예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그해 11월 링컨은 북부의 포토맥 군 사령관인 매클렐런을 해임하고, 번사이드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리치먼드로 보냈다.
그 사이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남부군의 리 장군은 버지니아 주의 프레데릭스버그에 참호(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구축하고 북부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참호 속에서 전투에 임했던 남부군은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북부군의 사상자는 1만 2천명에 달했다(프레데릭스버그 전투, 12월 13일).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 북부군의 사령관은 다시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후커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은 그해 겨울 내내 라파하노크 강 주변에서 남부군과 대치 상태로 있었다. 1863년 4월 후커 장군이 먼저 강을 건너 챈설러스빌 근처로 군대를 이동했다. 이때 후커의 부대는 병력 면에서 두 배나 우세한 상황이었음에도, 남부군의 동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리 장군의 기습을 받아 강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남부군은 ‘철벽 장군’ 잭슨이 남부군 경계병의 오인 사격으로 부상을 입고 사망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챈설러스빌 전투, 1863년 5월 1일~5일).
남북 전쟁에 철갑선이 등장했다고?
남북 전쟁 당시 바다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철갑선끼리 맞붙어 싸운 전투가 있었다. 바로 1862년 3월 9일, 버지니아 주 제임스 강어귀에 있는 햄프턴로즈 항구에서 벌어진 해전을 말한다.
이때 남부군은 전통적인 증기 프리깃 함(艦)인 북부군의 ‘메리맥 호’를 노퍽 해군 기지로 인양한 뒤, 상부 갑판을 철제로 덮어 새로 ‘버지니아 호’라 이름 붙여 북부군의 목제 함선들을 차례로 격침시켰다.
그날 밤 존 워든 대위가 이끄는 북부군의 철갑선 ‘모니터 호’가 도착했다. ‘뗏목 위의 양키 치즈 상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배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전함이다.
그날 양측의 지원병들이 근처의 다른 전함과 해안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말 극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두 철갑선이 맞붙은 전투에서는 대체로 모니터 호가 승리를 거둔 것으로 판정되었다. 이 해전은 전세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양 진영의 사기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최대의 격전, 게티즈버그 전투
남부군의 리 장군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남부 연합을 승인받기 위해 북부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 북부 포토맥 군의 사령관은 다시 조지 미드 장군으로 바뀌었다. 리 장군은 군대를 펜실베이니아 주 남부 게티즈버그로 진격시켰다. 양측 사령관은 모두 게티즈버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결의를 갖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전투가 시작된 7월 1일부터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이틀째 되는 날에도 중요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3일째 되는 날엔 피켓이 이끄는 남부군 선봉대가 북부군이 지키는 세미테리 능선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큰 타격을 입고 수백 명의 포로를 남겨둔 채 후퇴하고 말았다.
7월 4일 폭우가 쏟아지자, 리 장군은 그 틈을 이용해 버지니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북부군의 미드 장군은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리 장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리 장군은 더 이상 북부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미드의 결정은 훗날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의 동부 전선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게티즈버그 전투. 7월 1일~3일).
11월 19일 링컨 대통령은 격전지인 게티즈버그에 세워진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석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마침내 항복한 남부 연합
서부 전선에서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 1863년 7월, 미시시피 강의 도하점(도하 작전 때 군대가 강을 건너는 지점)인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뒤 남부방어의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였다. 이 전투 결과 북부군에게는 미시시피 강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고, 남부 연합은 둘로 나뉘었다. 그래서 빅스버그 전투 역시 남북 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 전투가 되었다(빅스버그 회전. 1862~1863년 7월 4일).
빅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그랜트 장군은 체터누가(남부의 전략 요충지)에 포위당해 있는 북부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장군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테네시 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커 장군과 셔먼 장군이 보낸 증원 부대까지 합세한 북부군은 룩아웃 산과 미셔너리 산맥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남부군을 물리치고 테네시 강을 장악하였다(체터누가 전투. 11월 23일~25일).
서부 전선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 그랜트 장군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64년 3월에 북부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북부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9월 3일에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11월에는 대서양 쪽으로 진격하여 12월 20일에 해안 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또 그랜트 장군이 직접 참여한 동부 전선에서는 남부군의 주력 부대인 리 장군의 노스버지니아 군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총공격을 펼쳤다. 북부군은 1864년 5월, 월더니스 전투부터 계속 남부군을 무찌르면서 진격하여 피터즈버그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포위한 지 9개월 만인 1865년 4월 그랜트 장군은 파이브포크스 전투(최후의 결전)에서 남부군의 주력군인 노스버지니아 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 결과 남부군의 리 장군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4월 9일에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항복을 했다.
엄청난 피해를 남긴 남북 전쟁
4년에 걸친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연방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해방된 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남북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길게 끌면서 양측 모두에 엄청난 피해를 안기고 말았다. 북부군은 약 36만 명이 전사했고, 남부군은 약 25만 명이 전사하는 인명 피해를 낳았다. 특히 패배한 남부는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쟁 중이던 1863년 1월 1일에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이미 많은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을 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4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되어 대농장 중심의 남부 지역으로서는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반대론자인 부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그가 주장했던 관대한 남부 재건 안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남부에서는 10년 동안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뒤 남부는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규모 농장은 소규모로 바뀌게 되었고, 북부 사람들의 투자로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면서 섬유·제철 등의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공업 생산량이 배로 증가하여, 미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877년까지 차례로 연방에 복귀하게 된 남부의 백인들은 무조건 민주당을 지지하는 ‘솔리드사우스(solid south)’를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공화당파와 여전히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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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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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미국의 남북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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