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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13개 주, 식민지에서 연합 국가로 독립

미국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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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 된 대영 제국

15세기경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년 오스만 1세가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소아시아에 세운 이슬람 왕국)은 세력이 매우 강해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방 무역로를 차단했다. 동방의 향신료나 금·은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교역하지 못하게 된 유럽의 여러 국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하는 시급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미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그 무렵 나침반과 항해도 등 항해술이 발달하여 먼 바다로의 항해가 가능해지자, 각 나라들은 신항로 개척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새로운 항로 개척에 가장 먼저 나섰던 나라는 지중해 동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이 두 나라 덕분에 인도로 가는 항로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그 뒤 16~18세기에 이르는 동안 포르투갈·에스파냐에 이어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도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특히 18세기에는 유럽에서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등 여러 전쟁을 통해 세력을 다퉜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도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열을 올렸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대서양 중부 연안에 있는 미국의 주)에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강력한 전제 정치(왕이 권력을 장악하여 의회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통치하는 정치)를 펼치던 제임스 1세가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면서 다른 교파에 소속된 사람들을 압박하였다. 그래서 청교도각주1) 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또 인클로저 운동(미개간지·공유지 등 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담이나 울타리 등의 경계선을 쳐서 남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하는 일)으로 새로운 농업 자본가인 젠트리들이 성장하자,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요먼(자영 농민. 젠트리와 노동자의 중간 계층)들도 새로운 대륙으로 떠났다. 이때 약 75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이 고국을 버리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가 제임스타운(버지니아에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최초의 식민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편 프랑스도 1608년 샹플랭(프랑스 탐험가)이 앞장서 퀘벡에 요새를 세우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그리고 1622년 콜베르(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루이 14세 시대의 정치가)가 재무 장관에 임명되면서 개발에 더욱 힘썼다. 루이 14세 때는 라살(프랑스 탐험가)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 뉴올리언스를 세우고, 그 지방 이름을 ‘루이지애나(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지음)’라고 지어 국왕에게 바쳤다.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북아메리카에서도 윌리엄 왕 전쟁(1689~1697년), 앤 여왕 전쟁(1702~1714년), 조지 왕 전쟁(1744~1748년),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 1763년) 등 제2차 백 년 전쟁이라 일컫는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특히 매우 치열했던 프렌치-인디언 전쟁각주2) 에서 영국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맞서는 전쟁을 프로이센에게 맡기고 식민지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원래 차지하고 있던 퀘벡·몬트리올 등 지금의 캐나다 전 지역에서 영국군에게 패했다. 이에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지배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17세기의 아메리카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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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변화가 가져온 독립의 불씨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영국은 18세기까지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모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식민지에 대해 거의 간섭하지 않았던 영국의 ‘건전한 방임 정책’ 덕분에 13개 주는 저마다 자유를 누리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7년 전쟁이 끝난 상태였다. 이 전쟁에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엄청난 돈만 소비하게 된 영국은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메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그동안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두었던 식민지에 눈독을 들였다. 여러 가지 법령을 만들어 식민지를 통제하고 세금을 늘리는 등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의 세금 수입을 늘리기 위해 1764년에 설탕세법(타국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설탕에 대한 과세), 1765년에 인지세법(식민지의 상업 및 법률 서류, 신문, 팸플릿, 카드, 달력, 주사위 등 모든 수입 인쇄물에 인지를 붙여 직접세를 부과하려는 법), 1767년에는 타운센트법(차·유리·납 등에 과세)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이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면서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과 함께 거세게 반발하였다. 결국 영국 의회는 1770년 차에 대한 관세만 남기고 모든 관세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동인도 회사(17세기에 유럽 각국이 인도, 동남아시아와 무역하기 위하여 동인도에 세운 무역 독점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자, 영국 수상 노스는 1773년에 북아메리카에서 동인도 회사만 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이 발표되자, 식민지 주민들은 보스턴 항으로 들어오는 동인도 회사의 배를 습격하여 차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보스턴 차 사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법(보스턴 항 폐쇄)·식민지 건설 특허장 폐기·재판 운영법·숙영법(영국 군대를 식민지인들의 가택에 민박)과 같은 4가지의 ‘참을 수 없는 법’ (강제법 또는 불관용법이라고도 함)을 만들어 식민지를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는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그 결과 13개 주의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대륙 회의를 열어 독립을 선언하다

1774년 영국 의회가 ‘참을 수 없는 법’을 통과시키자, 조지아 주를 제외한 식민지 대표 56명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차 대륙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본국 의회의 식민지에 대한 입법권(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부정하고, 본국과의 통상을 단절하는 등의 내용을 결의했다. 그리고 본국에 탄원서를 보내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한편, 전쟁에 대비한 군사 훈련에 들어갔다.

1775년 4월 영국 본국 군대와 식민지 민병대가 처음 충돌한 것은 보스턴 근교에서 벌어진 렉싱턴 전투(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였다. 1775년 봄, 식민지인들을 진압하라는 본국의 명령을 받은 토머스 게이지 장군(당시 매사추세츠 총독)은 애국파(미 독립 전쟁 때 식민지 정책에 반항했던 민병대)들이 준비해 놓은 무기와 탄약을 파괴하고, 애국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콩코드(미국 매사추세츠 주 동부 미들섹스 군의 읍)로 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진격하는 도중에 렉싱턴그린에서 70여 명의 현지 민병대와 부딪쳤지만 쉽게 무너뜨리고 진군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콩코드 전투에 패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도중 게릴라전을 펼치는 식민지군에게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식민지군은 뉴잉글랜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영국군이 주둔해 있는 보스턴을 포위 공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군은 영국군이 보스턴 북쪽 해안에 위치한 높은 언덕인 벙커힐과 브리즈힐을 점령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요새를 만들어 영국군과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식민지 민병대는 영국군에게 요새를 점령당한 채 패했다. 하지만 영국군 전력에 큰 손실을 입힘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식민지군은 다시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윌리엄 하우 장군(게이지 장군의 후임)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6년 3월에 보스턴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1775년 6월 15일부터 열린 제2차 대륙 회의에서 각 주 대표들은 조지 워싱턴 장군(1차 대륙 회의 때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한 인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민병대를 곧 정식 군대로 편성해 본격적인 독립 전쟁 준비에 나섰다. 그들은 몇 달 뒤 영국과의 완전한 분리를 결의하였고, 이듬해 7월 4일에 토머스 제퍼슨이 쓴 〈독립 선언서〉(로크의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기본적 인권과 혁명권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천명하고 영국의 폭정을 열거하고 있음)를 승인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 독립 선언은 곧 정식 선전 포고가 되었고, 이제 독립 전쟁은 내란이 아닌 두 나라의 전쟁이 된 것이다.

<독립 선언서>를 검토하고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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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의 전환점이 된 새러토가 전투

대륙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도 영국군과 독립군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리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캐나다를 공격하여 몬트리올을 장악하고, 퀘벡에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1776년 봄, 영국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선포하자, 영국은 리처드 하우 제독을 파견해 식민지 대표와 협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의지로 강하게 저항하던 독립군은 영국의 평화 제의를 거부한 채 계속 맞서 싸웠다. 영국 정규군에 비해 조직적인 훈련이나 장비 면에서 뒤처져 있던 독립군 부대는 계속되는 패배로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군 은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1776년 겨울 크리스마스 전날 밤, 독립군 총사령관 워싱턴은 군대를 이끌고 트렌턴(미국 뉴저지 주의 도시)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천여 명에 이르는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바로 프린스턴(미국 뉴저지 주의 도시)으로 이동해 영국군 3개 군단과 맞서 싸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독립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트렌턴·프린스턴 전투이다.

한편 캐나다에 주둔해 있던 존 버고인 장군이 지휘하던 영국군은 1777년에 남쪽으로 이동해 7월에 타이콘더로가 요새(뉴욕 주 북동부에 위치)를 함락시키고, 에드워드 요새(뉴욕 주 동부 허드슨 강 상류)까지 장악했다. 그 뒤 존 버고인 장군은 일부 병력만 남겨 두고, 30일분의 식량과 군사들을 이끌고 허드슨 강을 건너 뉴욕의 사라토가 부근에 진을 쳤다. 근처 약 6.5km 거리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계속 병력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 군대는 대치 상태가 되었다.

9월 19일 영국군은 남쪽으로 이동해 프리맨스팜으로 진격해 먼저 공격했다. 그렇지만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는 실패한 채(1차 새러토가 전투(프리맨스팜 전투)), 올버니(미국 뉴욕 주의 주도)로 진격했다. 10월 7일 존 버고인 장군은 1,500명을 이끌고 정찰에 나섰다가 베미스 고원에서 독립군의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 군대의 반격을 받았다(2차 새러토가 전투(베미스 고지 전투)).

그 당시 존 버고인의 부대는 병력도 줄고 보급품도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레이셔 게이츠의 군대에 포위되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존 버고인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7년 10월 17일 새러토가 협정을 맺고 항복하였다. 새러토가 전투 결과,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면서 전쟁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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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국제전으로 변한 전쟁

이 무렵 7년 전쟁 이후 유럽 최강국이 된 영국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독립군을 돕겠다고 나섰다. 독립군은 자금이나 장비·군사력(특히 해군력) 등 여러 면에서 모두 영국에 비해 뒤떨어졌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프랑스였다. 이미 프랑스는 1776년부터 몰래 독립군에 군수품과 엄청난 양의 화약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 그 뒤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프랑스는 1778년 함대와 육군을 보내 공식적으로 참전하여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러시아·프로이센·덴마크 등은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이 식민지의 해상 봉쇄를 강화하자, 무장 중립 동맹을 맺고 자국의 사나포선(사략선. 교전 중인 적선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민간 소유 무장 선박)을 이용하여 독립군에 군수 물자를 운송해 주었다. 이로써 식민지에서 다시 유럽 열강들의 국제전이 시작되었다.

요크타운 전투와 아메리카 합중국 탄생

유럽의 원조를 받은 독립군은 프랑스 군과 손잡고 1781년 전쟁을 마감하는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 사령관 콘 윌리스는 남부 지역 전투에서 계속 패해 전력에 손실이 커지자, 버지니아로 이동해 요크타운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러자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은 육로를 차단해 영국의 증원군이 요새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 그라스 백작이 지휘하는 24척의 프랑스 함대는 체서피크 만(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 평야에 있는 큰 만. 남부로 버지니아와 경계)을 장악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1781년 독립군의 워싱턴 장군은 프랑스 로샹보 백작이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콘 윌리스의 요새를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해상에서는 토머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해군에 밀려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육·해 양쪽 모두에서 지원이 막혀 버린 영국군은 프랑스 함대와 지상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 해전은 계속되었지만, 지상에서의 전투는 모두 끝이 나 사실상 독립 전쟁은 마감되었다.

1783년 전쟁에 참여했던 국가들은 파리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영국은 미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 남쪽은 동·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에 이르는 땅을 영토로 인정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각주3) 는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새로운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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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선 집필자 소개

역사 논술 강사. 목포대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 국제문화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 논술 강의를 시작해 현재 경기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사이버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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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 저자정미선 도서 소개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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