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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를 둘러싼 러시아와 열강들의 각축전

크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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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강대국이 되고 싶었던 러시아의 남하 정책

최후의 종교 전쟁이었던 30년 전쟁 이후 17세기 말부터 유럽의 열강들은 자국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영토 분쟁이 잦아지면서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찌감치 중상주의(16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경제 정책. 나라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히 여김) 정책을 앞세워 절대 군주제(군주가 국가 통치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 체제)를 완성한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아직도 중세 봉건적 농노제가 기반인 러시아는 후진성(일정한 수준을 기준으로 할 때 그보다 뒤떨어진 상태)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말에서 유럽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쓴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국가의 힘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부동항(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동쪽 시베리아 방면과 서쪽 발트 해 방면, 남쪽 흑해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동쪽으로는 청나라, 서쪽으로는 영국의 견제에 막혀 뜻을 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표트르 대제 때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러시아는 서아시아의 최강국인 오스만 튀르크가 버티고 있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준비했다.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쓴 표트르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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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유럽의 열강들이 세력 다툼(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등)을 하고 있는 틈을 타,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는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고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 개혁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녀는 두 차례에 걸친 투르크와의 전쟁(1768~1774년, 1787~1792년)을 통해 흑해 연안과 크림 반도를 점령하였다. 특히 1744년에는 쿠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통해 투르크 내의 그리스 정교도 보호권과 보스포루스 해협(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여 터키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가르는 해협)의 자유 항해권까지 얻어 냈다.

그 무렵 러시아 안에서는 카자크 족 장교 출신 푸가초프가 엄청난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한참 흑해 진출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 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고 몰락하자, 한층 목소리가 커진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는 유럽의 열강들과 신성 동맹각주1) 을 맺고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때 투르크와는 상호 불가침 조약(나라들 사이에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말자고 맺는 약속)을 맺었다.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가 남쪽 진출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1821년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교도(이슬람)들로부터 기독교인(그리스정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흑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바로 전쟁에 개입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그리스 독립을 지원하고 나섰는데, 이는 투르크에 대한 반감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투르크가 연합군 측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계속하자, 영국·프랑스·러시아 함대는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투르크 측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마침내 1832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투르크의 술탄이슬람의 최고 통치자 마무드 2세는 그리스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는 니콜라이 1세였다. 그는 데카브리스트 난이 일어났을 때, 왕위에 올라 난을 진압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폴란드 독립 운동이나 헝가리 독립 운동에도 개입하여 위력을 떨쳤다. 1832년에 이집트의 이브리힘 피샤가 반란을 일으키고 투르크를 공격하자, 투르크의 마무드 2세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와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바로 지원군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의 독점 항해권을 획득하였다. 이로 인해 투르크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는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에 바다를 장악한 뒤 흑해 연안에 요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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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정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시작된 전쟁

185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르크와의 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인정받았다. 그러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1744년 투르크와 맺은 케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근거로, 투르크 영토 안에 사는 그리스 정교도들의 보호권이 러시아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의 방해로 러시아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1853년 7월,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도나우 강 하구의 공국(왕보다 낮은 작위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군주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각주2) 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는 이 문제가 터지기 전에 이미 영국과 투르크 문제에 대해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침공에 대해 영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본격적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은 바로 투르크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함대를 보스포루스 해협(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가르고 있는 해협)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투르크는 같은 해 10월,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 러시아 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1856년까지 또다시 크림 전쟁(대부분의 전투가 흑해에 있는 크림 반도 주변에서 일어나 붙여진 이름)이라 부르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와 연합군의 본격적인 대결

1853년 11월 흑해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의 함대가 소아시아각주3) 북쪽에 있는 시노페 앞바다로 진격해 투르크 함대를 전멸시켰다. 그러자 1854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함대를 흑해로 진입시키면서,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해 3월 28일,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향해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승리의 여신이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다. 그렇지만 투르크와 영·프 연합군이 발칸 반도와 흑해 북부, 카프카스 지방(유럽권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지역으로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 등 삼면에서 러시아를 공격해 오자, 러시아는 불리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 우방(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라고 믿었던 오스트리아마저 러시아를 압박해 왔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자기네 나라로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지역에서 철수한 뒤,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로 군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854년 8월에 군대를 보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로서는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1849년에 오스트리아 제국 안에서 헝가리 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가 군대를 보내 위기로부터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러시아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까지 합세한 연합군 측을 상대로 혼자서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되었다.

투르크 함대와 러시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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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세바스토폴 요새 전투

전투는 주로 흑해 인근 바다에서 벌어졌다. 연합군이 군대를 몰고 들어온 카프카스 지방은 지형이 워낙 험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와 투르크 군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제 범선이 주를 이루는 러시아 함대는 증기선으로 구성된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에 맞서 싸울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바다를 장악한 뒤 흑해 연안에 세웠던 러시아의 요새들은 연합군 함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큰 타격(어떤 일에서 크게 기가 꺾이거나 손실을 봄)을 입었다.

이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크림 반도 남서 해안의 흑해 함대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토폴을 집중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1854년 9월에 연합군은 크림 반도로 상륙해 알마 강 유역과 발라클라바 등을 장악하고,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군항으로서 발전해 온 세바스토폴은 도시 자체가 요새였기 때문에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러시아는 연합국의 함대에 비해 자신들의 해군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국의 함정을 모두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굳게 막아버리거나 잠금)하여 연합군의 진입로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도시의 주민들과 함께 외곽 방어선의 중심지인 말라코프 고지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을 대비한 방어 작전에 들어갔다.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우고 있던 프랑스 외인부대각주4) 는 세바스토폴 요새 공격에서도 앞장서서 싸웠다. 하지만 러시아 군의 철통같은 수비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만 늘어날 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져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다. 1855년 1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각주5) 도 군대를 보내 연합군에 합류했지만, 양진영의 전투는 교착 상태(어떤 상태가 굳어 조금도 진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이 1855년 3월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죽고, 뒤이어 그 아들 알렉산드로 2세가 즉위하여 전쟁을 이어갔다.

1855년 5월 연합군 측이 먼저 공격에 나섰지만, 수백 명의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6월에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6천명이 넘는 희생자만 낸 채, 또 물러서야 했다. 러시아는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도 수시로 진지와 성곽을 복구하여 더욱 철통같은 수비를 하였다. 이에 연합군의 공격은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의 주요 거점인 말라코프 고지를 함락시켜야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1855년 9월 8일 군사 보충을 마친 외인부대를 선봉으로 다시 요새를 공격하였다. 외인부대가 요새로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사이 9월 11일, 연합군의 주력 부대가 화포를 쏘며 총공격을 펼쳤다. 이로써 러시아의 요새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러시아는 자신들이 구축한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모두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결국 349일간 벌어졌던 세바스토폴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세바스토폴 요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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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1월에는 스웨덴이 연합군 측에 가담하였고, 12월에는 오스트리아까지 러시아가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2세는 연합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소득 없이 막대한 손실만 남긴 크림 전쟁

3년에 걸친 크림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자신들이 원했던 대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다시 한 번 유럽의 강호로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식민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전쟁에 패한 러시아는 더 이상 흑해에 함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었고, 베사라비아(몰다비아 땅으로, 드네스트 강과 푸르트 강 사이에 위치한 농업 지대)를 투르크에게 넘겨주었다. 또 투르크 제국 내 그리스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도 거두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가 패배하기 전까지 약 14년 동안 국제 무대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2세는 유럽의 열강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후 진성을 탈피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1861년 농노 해방령을 실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 뒤 러시아는 1877년에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남하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시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뒤늦게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깨고 전쟁에 참여하여, 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러시아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도 받지 못해 오스트리아는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로써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외교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던 빈체제는 무너졌고,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유럽의 국제법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림 전쟁은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연합군 모두에게 큰 손실만 남겼다. 그렇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무기와 전략을 앞세운 현대전이 등장하게 되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치열한 전투와 전염병이 겹친 크림 전쟁으로 인해 양측은 모두 약 25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손실을 낳게 되었다. 이때 영국《타임즈》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 기자(세계 최초의 종군 기자)는 전쟁 소식을 본국으로 보내, 고통스러운 참상을 그대로 세상에 알렸다.

이 소식을 접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고통받는 군인들을 위해 간호사들을 인솔하고 전쟁터로 향했다. 당시 나이팅게일은 런던 숙녀 병원 간호 부장이었다. 그녀는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야전 병원(전선 후방에 세워진 임시 병원. 크림 전쟁 당시 세계 최초로 세워짐)을 세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치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백의의 천사’라고 불렀고,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을 ‘천사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크림 전쟁에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한 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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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앙리 뒤낭이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장하였고, 유럽의 각국이 적극 협조하여 1863년 국제 적십자가 창설되었다. 1864년에는 국적이나 정치, 종교, 사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 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적십자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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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선 집필자 소개

역사 논술 강사. 목포대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 국제문화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 논술 강의를 시작해 현재 경기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사이버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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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 저자정미선 도서 소개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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