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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 마찰이 낳은 전쟁
아편 전쟁
발생 | 18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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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860년 |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청나라
1616년 건주 좌위 여진각주1) 의 추장 누르하치(태조 천명제)는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틈을 타, 여진 부족을 통합하여 만주국인 후금을 건국하였다. 그의 아들 아바하이(태종 숭덕제)는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내몽골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 국가 조직들을 정비하는 데 힘써 청나라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 체제(전체 군사를 8개의 군단으로 나누고, 8종류 깃발로 구분)를 확립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한편 명나라는 1643년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해 멸망하고 만다. 그러자 청의 3대 황제인 순치제(세조)는 숙부인 도르곤(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태종이 죽고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보정왕으로서 섭정함)의 도움으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그 후 강희제(성종) 때 몽골 족을 완전 복속시켜 중국 지배의 안정된 기반을 구축했다. 옹정제(세종)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체결한 국경 확정 조약.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으로 국경을 정함)을 맺으며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 지었고, 건륭제(고종)에 이르러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왕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 13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청 왕조도 18세기 말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건륭제 때 많은 외정(군대를 이끌고 외국으로 나가 전쟁에 출정함)과 내부 분열, 사치 등으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을 누리자 팔기군은 무력해지고, 관리들은 부패했다. 인구 증가로 경작지나 식량이 부족한 가운데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때 백련교의 난각주2) 이 일어나, 가경제(인종)가 난을 평정하는 동안 약 1억냥이나 되는 돈을 소모하였다. 그 결과 국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이용한 영국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대량 생산된 상품을 팔기 위해 이미 포화 상태가 된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시장인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판매 시장 개척에 걸림돌이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청나라의 공행 무역 체제였다.
공행 무역 체제란 관청의 허락을 받은 일부 상인들이 광저우(중국 광둥성의 성도이자, 화난 지방 최대의 무역 도시)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다. 또 청나라는 수출하는 모든 물품의 값을 오직 은으로만 결제하도록 다른 나라에 요구하였다.
그 당시 영국이 청나라에 수출하고자 했던 물품은 면·모직물이 중심이었고, 수입품은 차·비단·도자기 등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면·모직물은 청나라 내에서 수공업으로 자급자족(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생산하여 충당함)해도 충분했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았는데 비해, 영국인에게 있어 이미 필수품이 된 차는 영국 내에서 엄청난 양이 소비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무역 적자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영국은 계속되는 무역 불균형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공행의 무역 독점권 폐지를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차를 사들일 은이 부족해진 영국은 은을 지불하지 않고도 차를 수입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각주3) 을 청나라에 수출하기로 결정했다. 1773년, 영국은 동인도 회사에 아편 전매권(어떤 물건을 혼자서만 판매할 수 있는 권리)을 주고, 무역 허가권이 없는 청나라의 지방 무역 상인들이 그 아편을 밀수입(세관을 거치지 않고 몰래 외국의 물건을 사들여 옴)하게 하여 아편을 퍼트리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아편은 순식간에 청나라 전역에 퍼졌고, 심각한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빈민층의 아편 복용으로 농촌 경제는 파탄(일이나 계획 따위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잘못됨)에 빠졌고, 아편에 빠진 관료나 병사들로 인해 국가 기능까지 마비될 지경이었다. 세금으로 내야 할 은까지 아편을 사는 데 다 쓰는 바람에 세금이 걷히지 않자, 청나라는 엄청난 재정 파탄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39년, 임칙서각주4) 를 흠차 대신(황제의 특명을 받아 전권을 갖고 파견되는 관리)으로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제1차 아편 전쟁(1839~1842년)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 밀매와 관련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동시에 모든 상인들에게 아편 밀매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편 밀매 중지 서약서를 쓰게 하고, 그들이 보유한 아편을 모두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측은 임칙서가 강경하게 나오는 이유를 잘못 해석한 나머지, 아편 1,037상자만 내놓으면서 그의 체면을 세워 주려고 했다.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 2만 상자가 넘는 아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임칙서는 영국 측의 행동을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더욱 강경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임칙서는 2만이 넘는 아편 상자를 모두 몰수(법이 금지하는 물건이나 범죄로 얻은 물건을 관청에서 모두 거두어들임) 했는데, 이것이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임칙서는 영국인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 일행을 감금한 상태에서, 몰수한 아편을 광둥 성 근처 갯벌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집어넣은 뒤 불태워 없앴다. 이것으로 불법 아편 매매를 근절시켰다고 생각한 임칙서는 일부 제재를 풀어 합법적인 아편 거래는 허용하였다. 하지만 이미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아편 가격은 천정부지(천장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물가 따위가 한없이 오르기만 하는 것을 비유함)로 치솟게 되었다.
그러자 1839년 8월, 임칙서는 다시 외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시키고, 광둥 성의 공장들을 포위하여 아편 생산에 제재를 가했다. 그 사이 엘리엇은 영국 상인들을 모두 마카오로 철수시킨 뒤, 본국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무렵 주룽(중국 광둥 성 남동부에 있는 중심 도시. 홍콩에서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교통 요충지)에서 영국 해병이 청나라의 농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칙서는 영국 측에 범인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영국의 무역관 엘리엇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임칙서는 군대를 이동시켜 마카오일대를 봉쇄하였다. 당시 마카오를 지배하던 포르투갈은 영국인들에게 그 지역에서 떠나라는 압력을 넣었다. 엘리엇은 영국인들을 모두 상선(돈을 받고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데 쓰는 배)에 태우고, 홍콩과 주룽 사이의 해상에 머물게 되었다. 임칙서는 또 다시 그 선박들에 대해 양식 공급을 중지할 것과 함께, 육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국인은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영국에서는 의회 내의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회 등이 도덕적 이유를 내세워, 아편 무역과 청나라와의 전쟁에 반대하면서 군대 파견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인 1839년 10월, 이미 청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였다
영국 함대는 임칙서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엘리엇은 영국인에 대한 압박을 풀어 달라는 협상을 하기 위해 주룽으로 갔다가 청나라 해군과 첫 충돌을 벌이게 되었다. 이어 11월에는 촨비(광둥 성에 있는 도시)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청나라는 영국 함대에 참패를 당했다.
화가 난 임칙서는 12월에 영국과의 통상(나라들 사이에 서로 물품을 사고팖. 또는 그런 관계) 정지를 선포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1840년 2월에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무역관 찰스 엘리엇의 사촌형)을 전권 대사(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외교를 맡아보는 최고 직급)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또 인도와 스리랑카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남중국해(태평양과 중국해의 일부분으로 중국 화난 지방의 남쪽에 걸쳐 있는 해역)로 집결시켰다. 그해 4월 자본가 집단의 압력을 받은 영국 의회도 청나라와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아편 전쟁’이라 불리는 전면전(일정한 범위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지 엘리엇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저장 성(중국 동부의 동중국해 연안에 있는 성. 주도는 항저우)에 위치한 저우산 군도를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베이징의 통로에 있는 다구, 텐진(중국 화베이 지구에 있는 중심 도시) 앞바다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 조정은 다급히 임칙서를 면직(일정한 직무에서 물러나게 함)시키고, 기선을 보내 영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이때 영국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여긴 청나라 도광제(선종. 인종 가경제의 둘째 아들로 1820년 즉위)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선을 소환하여 관직을 박탈해 버렸다. 그러자 영국군은 일방적으로 촨비 가조약각주5) 을 선포하면서 홍콩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1841년 8월에 헨리 포틴저가 새로운 전권 대사로 광둥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2년에 군대를 증강하여 상하이를 점령한 다음, 양쯔 강을 거슬러 올라가 전장(중국 장쑤 성 남부 양쯔 강 삼각주에 위치한 도시)을 점령하였다. 난징(중국 장쑤 성의 중심 도시. 오·송·양 등의 도읍지였음)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청나라 군대는 전장에서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영국군이 난징과 함께 수도인 베이징까지 위협하고 들어오자, 1842년 8월 29일 도광제는 영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맺어진 조약이 홍콩 할양(땅이나 물건 따위를 한 부분 떼어서 남에게 넘겨줌)과 광저우 등 5개 항구의 개항, 공행의 무역독점 폐지 등 7개 조항을 내용으로 한 난징 조약이다.
다음 해 영국은 난징 조약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치외 법권(다른 나라의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국제법에서의 권리) 인정·최혜국(통상 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유리한 대우를 받는 나라) 대우·관세 자주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후먼 추가 조약까지 맺었다. 이로써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의 약체가 드러나자, 서구 열강들도 앞다투어 청나라를 넘보게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는 1844년에는 미국과 왕샤 조약, 프랑스와 황푸 조약 등 불평등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실업자가 늘어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의 불만이 날로 커져, 결국 1851년 태평천국의 난각주6) 까지 일어나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제2차 아편 전쟁(1856~1860년)
태평천국의 난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856년 10월 8일, 광저우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홍콩의 아편 밀수선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12명의 해적 용의자를 연행하였다. 광저우의 영국 영사는 조약위반과 배에 걸려 있던 영국 국기를 내린 것은 영국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공개 사과와 함께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이 제2차 아편전쟁의 시발점이 된 애로호 사건이다.
영국은 난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 시장을 점유하려 했으나, 자국의 공업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지 않고 무역에 큰 성과가 없자, 청나라에 난징 조약 이행과 아편 자유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고 미루자, 영국은 다시 무력으로 밀어붙일 구실을 찾고 있던 차에 애로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청나라가 애로호 사건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광시 성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 샤프들레이네가 중국 관리에게 처형당한 사건을 구실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1856년 12월 28일, 공격을 시작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다음 날 광저우를 점령하고 청나라와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에는 미국과 러시아 대표들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연합군은 베이징을 위협하기 위해 북상하여 톈진까지 진격하였다. 결국 청나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858년 6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영국·프랑스와 톈진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 내용은 외국 공사(국가를 대표하여 파견되는 외교 사절)의 베이징 주재, 양쯔 강 유역을 비롯한 북부 지역 10개 항구 개항, 여행과 무역·포교의 자유, 치외 법권 확대, 아편 무역의 승인, 배상금 등에 관한 것이다.
1859년 톈진 조약의 비준서(국가의 전권 위원이 조인한 조약 문서를 최고 주권 기관이 승인하는 법적 문서)를 교환하기 위해 다시 청나라로 들어온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조약을 거부하는 청나라 군대와 다구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를 당했다. 이에 다시 원정군을 보강한 연합군은 1860년 10월에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베이징 조약에는 톈진 조약의 내용에다, 톈진 항의 개항과 영국에 주룽 할양 등이 추가되었다.
아편 전쟁의 결과와 의의
1, 2차 아편 전쟁에서 모두 패한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과 주룽을 할양하고, 베이징 조약 때 중재에 나선 러시아에게 헤이룽 강 북쪽 땅을 할양하는 등 적지 않은 영토를 잃었으며, 많은 항구를 개항해야 했다. 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관세 자주권까지 빼앗기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말았다.
청나라는 아편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의 강호로서, 주변 국가에 떨쳤던 중화주의(중국 사람이 자기 민족을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여 온 사상) 위상이 추락하게 되었다. 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인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어 버렸지만, 뒤늦게나마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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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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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편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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