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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제국의 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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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태양, 마케도니아

그리스 인들이 발칸 반도(유럽 남부, 지중해 동부에 튀어나와 있는 삼각형의 반도)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그냥 북부에 남아 있다 다리우스 1세 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작은 나라가 바로 마케도니아였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1세(기원전 498~기원전 454년 재위) 때 페르시아와 싸워 왕국으로 독립은 했지만, 그리스 인들이 ‘바르바로이(야만인, 오랑캐)’라고 부르며 얕잡아 볼 정도로 뒤처진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세계 정복을 꿈꾸는 대제국이 되어 역사 속에 영원히 그 이름을 빛내는 나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서도 오랫동안 원시적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바르바로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아테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정치적 능력이 탁월했던 아르켈라오스 왕(기원전 413~기원전 399년 재위) 때는 국력이 크게 발전하였다.

한편 발칸 반도 남쪽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의 지도자로서 힘을 잃자, 스파르타와 테베가 차례로 폴리스들을 대표하는 패권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제국의 규모까지 이르렀던 아테네의 빈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 뒤 아테네가 다시 일어났지만,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 ‘동맹시 전쟁(기원전 357~기원전 355년)’을 겪게 되었다.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 즉위한 필리포스 2세(기원전 382~기원전 336년)가 군사력을 강화하여 영토를 넓혀 가고 있었다. 그는 금광을 개발해 국가의 경제력을 기르고, 테베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배워 온 에파미논다스각주1) 의 전술을 이용하여 팔랑크스각주2) 라는 장창 밀집 부대를 편성하였다.

또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에 케로네아(그리스 중부 델포이 동쪽에 있는 지역)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그리스를 통합하였다. 이것으로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지배가 시작되어, 여러 폴리스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 뒤 코린토스 동맹이 조직되어 필리포스 2세를 맹주로 하는 통일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후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대제국을 이루는 기틀이 되었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 알렉산드로스

그리스를 통일한 필리포스 2세는 발칸 반도가 여전히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자, 페르시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코린토스 동맹국들에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그리스 군대와 연합하여 원정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원정을 나서기 직전에 암살당해, 그의 정복 계획은 고스란히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이라고도 함)에게 넘어갔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알렉산드로스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이미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전쟁에 나간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대신해, 마케도니아를 맡아서 통치하면서 트라키아(발칸 반도 동부에 위치한 지역)의 마이다 부족을 무찔렀다. 또 케로네아 전투에서는 군대를 지휘하여 테베의 신성 동맹을 무찌를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기원전 336년에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군대의 지지를 받아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페르시아 정복에 나설 준비를 했다.

세계 대제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원정에 나섰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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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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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그리스의 폴리스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필리포스 2세가 죽고 젊은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리스 중부의 중심지인 코린토스를 점령해 버렸다. 너무도 재빠른 공격에 당황한 그리스 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반란을 진압한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에서 폴리스 전체 회의를 열고, 아버지 때 맺었던 ‘코린토스 동맹’을 다시 새기면서 그리스에 대한 지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마케도니아 북쪽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를 공격하여 모두 진압하였다. 그런 가운데 알렉산드로스가 전투 중에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테베가 아테네와 손을 잡고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군대를 끌고 가 테베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테베가 항복하지 않고 버티자, 다른 폴리스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테베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이 전투에서 테베는 6천 명의 군사가 죽었고, 3만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결국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예상대로 아테네가 항복을 청해 오자, 아테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처분했다.

아버지를 놀라게 한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가 열두 살 되던 해, 궁궐에 들어온 말 장수가 자신의 말이 명마라며, 한 마리 값으로 13탈란트를 불렀다. 이것은 그 당시 말 한 마리 값으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말 장수가 명마라고 주장하는 말의 이름은 ‘부케팔로스’였다. 부케팔로스는 ‘부(소)’, ‘케팔로스(머리)’, 즉 소머리라는 뜻이다. 필리포스 2세가 말 이름의 내력을 묻자, 말 장수는 소머리 모양의 흰 무늬가 있는 그 말의 배를 보여 주었다.

필리포스 2세는 어린 알렉산드로스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명마를 타려고 경마장으로 갔다. 그런데 부케팔로스는 사람이 등에 오르려 하면, 마구 날뛰어 도저히 올라탈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필리포스 2세는 성질만 고약한 야생마를 끌고 와서 명마라고 우긴다며 말 장수를 꾸짖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스가 “솜씨도 용기도 부족한 사람들 때문에 천하의 명마를 잃는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필리포스 2세가 알렉산드로스를 나무라자, 그는 자신이 말을 다루지 못하면 말 값을 대신 치르겠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살그머니 부케팔로스 옆으로 다가가서 고삐를 잡고 해가 떠 있는 쪽으로 말을 돌려세웠다. 이제 좀 얌전해진 부케팔로스와 나란히 걸으면서 목덜미를 쓰다듬던 그가 잽싸게 말 등에 뛰어올라 탔다. 그러자 부케팔로스는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말에서 내려왔을 때, 필리포스 2세는 아들을 껴안으며 “네 나라는 네 손으로 찾아라. 내 나라 마케도니아는 너에게 너무 작을 것 같구나.”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필리포스 2세는 이 예사롭지 않은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들였다.

아시아 정복의 길을 연 이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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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북방을 모두 안정시킨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에 보병 3만 명, 기마병 5천 명, 함대 160척으로 구성된 코린토스 동맹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지나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차지했다. 그리고 사르디스(고대 리디아의 수도)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도 대부분 차지하였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소아시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이수스에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이수스는 산이 바다와 접해 있고 강이 흐를 뿐 아니라, 땅의 굴곡이 심한 지형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이곳에서 제대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보병을 중앙에 두고, 기병대를 양 날개에 배치한 뒤, 피나로스 강 맞은편 둑에 진을 치고 있던 페르시아 군을 향해 진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재빨리 강을 건넌 뒤, 군대의 맨 앞에 나서서 페르시아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페르시아 군 왼쪽 진영을 격파한 다음, 적의 중앙부를 이루고 있던 그리스 인 용병 부대를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빠른 공격에 페르시아 군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 3세는 병사들과 가족을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가 버렸다. 그렇게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을 ‘이수스 전투’라고 한다.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레바논 남부에 있는 도시)와 가자(이집트의 북동부, 팔레스타인 남서부에 있는 도시. 예로부터 지중해와 이집트를 잇는 중요한 무역 중계지이며 군사 요충지)를 비롯해, 시리아·페니키아를 차례로 정복한 다음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나일 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1,000km가 넘는 사막을 지나, 고대 이집트 제국의 수도였던 테베까지 가서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는 ‘신(神)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 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민족’ 이라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나라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아우르는 밑바탕이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 싸우는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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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움의 매듭과 예언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던 중 기원전 334년에 고르디움(과거 리디아 동쪽에 위치한 프리지아의 수도)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신전 기둥에 전차 한 대가 매우 복잡한 매듭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매듭은 옛날 미다스 왕국의 사위였던 고르디우스가 왕위에 오른 뒤, 신전에 전차를 바치면서 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당시 고르디우스 왕은 “매듭을 푸는 자가 이 전차를 타고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예언을 믿고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으나 그 매듭을 풀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칼을 뽑아 들고는 그 매듭을 잘라 버리고, 그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페르시아 원정의 마지막 싸움,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 봄,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에서 패전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티그리스 강변의 가우가멜라에 보병 20만 명, 기마병 4만 5천 명과 200대나 되는 전차를 배치해 놓고,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기다렸다. 가우가멜라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번에도 직접 앞장서서 페르시아 군대의 한가운데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페르시아 군은 우왕좌왕하다가 또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다리우스 3세는 도망쳤지만, 부하인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행정 중심지인 수사와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등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손에 넣었다. 기원전 330년에 그는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열병 때문에 무너진 제국의 꿈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성공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동맹군을 모두 해산시키고, 자신이 거느린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군 가운데서 지원한 병사들만 거느리고 다시 동쪽 원정길에 나섰다. 그 뒤 파르티아(고대 이란의 왕국)·박트리아(고대 그리스 인들이 중앙아시아 남부에 세운 왕국)를 정복하면서 이란 고원까지 차지하였다.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러서는 그 지역의 군주인 포루스 왕과 싸워 이겼고, 뒤이어 갠지스 강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은 지쳐 있었고, 계속되는 장마로 인해 더 이상 동쪽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기원전 323년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그곳을 대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다시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만 열병에 걸려 열흘 만에 죽고 말았다.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3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열병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유언도 남기지 않고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제국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다. 디아도코이(서로 자신이 대왕의 후계자라고 주장한 부하 장군)들은 서로 담합하여 록사네(박트리아 족 추장의 딸로, 기원전 327년에 알렉산드로스와 결혼)가 낳은 알렉산드로스 4세와 필리포스 2세의 서자이면서 백치로 알려진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를 공동 왕으로 지명하고, 여러 속주를 나누어 가졌다. 그 뒤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인 카산드로스가 공동 왕이던 두 사람을 죽이자, 디아도코이들은 40년 동안이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하나로 통치되기 어려워진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안티고노스 1세(마케도니아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이집트), 셀레우코스 1세(페르시아·시리아 등의 소아시아 지역)가 지배하는 3개의 왕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뒤 기원전 1세기에 세 나라 모두 로마에게 멸망하였다.

1506년 발견되자마자 당시 유럽 인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헬레니즘 문화의 대표적 작품인 라오콘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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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유산, 헬레니즘

세계 최초로 동서양을 합친 제국을 이룬 알렉산드로스 3세는 시리아,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 등을 정복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와 비슷한 새로운 도시들을 70개나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리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나중에 만든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키는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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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선 집필자 소개

역사 논술 강사. 목포대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 국제문화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 논술 강의를 시작해 현재 경기대학교, 조선대학교, 서울사이버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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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 저자정미선 도서 소개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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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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