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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로마 사회 변화가 가져온 두 전쟁
유구르타 전쟁 · 동맹시 전쟁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사회의 변화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너뜨린 로마는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서부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 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른 끝에 마케도니아를 속주(이탈리아 반도 이외의 로마 영토)로 만들었고, 시리아 등으로 진출하여 오리엔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때부터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는 말이 생겼다.
로마의 영토 확장은 로마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가 정복한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세금은 로마의 지배층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또 로마의 지배층은 식민지의 넓은 땅을 독점하고 많은 노예를 가지게 되면서 대규모 농장, 목장, 과수원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대농장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다.
로마 지배층이 라티푼디움을 경영하자 로마에는 농산물이 싼값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산물이 대량으로 싼값에 들어오자,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던 자영 농민들은 생활이 어려워졌다. 로마의 중산층으로 전쟁에 나가야 했던 자영 농민들은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와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데다 농장 운영까지 어려워지자 기반이 점차 무너져 갔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팔고 로마 시내로 들어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유민, ‘프롤레타리아’의 유래)라 불리는 도시 노동자가 되었다.
결국 로마에는 전쟁, 식민지 등으로 이익을 본 부유한 실업가와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귀족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영 농민을 핵심으로 한 공화정이 무너지고, 원로원 중심의 새로운 귀족 정치 공화정이 자리를 잡았다.
이 무렵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 간의 계급 투쟁, 지배층의 권력 다툼, 국가 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사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선 최초의 인물이 그라쿠스 형제각주1) 였다. 기원전 133년,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했다. 또 재산이 없는 시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도록 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반발을 사, 그들이 사주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테베리우스의 개혁 시도는 그렇게 사라졌다.
유구르타 전쟁(기원전 111~기원전 104년)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로마는 민회를 중심으로 한 평민파(새로운 형태의 민중적인 정치가)와 벌족파(원로원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나가려는 정치가), 경제적인 힘을 갖고 있던 독자적인 세력인 기사층의 대립으로 정치적·사회적 세력 다툼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는 토지를 소유한 평민들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했고, 그 결과 자영 농민들이 중심을 이루었던 로마 군대 체제는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로마 군대가 예전처럼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자, 세력이 커진 주변 민족들이 계속 이탈리아의 국경을 침입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111년, 북아프리카의 동맹국인 누미디아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세력 다툼을 통해 누미디아의 왕위에 오른 유구르타는 자신을 누미디아의 왕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로마의 패권(경제력이나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압박하여 자기의 세력을 넓히려는 권력) 아래 동맹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그 당시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베스티아는 유구르타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누미디아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유구르타가 로마에 머물고 있던 누미디아 왕족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싫어하는 로마 인들은 유구르타를 제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원전 110년에 누미디아로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로마 군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누미디아의 병사들에게 패하고 무기까지 빼앗긴 채 로마로 돌아왔다.
더는 물러설 수 없게 된 로마는 기원전 109년에 집정관 메텔루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군대를 누미디아로 보냈다. 이때 메텔루스를 보좌하는 부장으로 전투 경험이 많은 48세의 마리우스가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로마 군이 승리하는 듯 보였지만,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마리우스는 상관인 메텔루스에게 전략을 변경하자고 제안했는데, 메텔루스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마리우스는 로마 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집정관에 출마했다. 그 결과 기원전 107년 유구르타 전쟁에 대한 공약으로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뽑혔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 제도로 바꾸었다. 이제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직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마리우스는 누미디아로 가기 위해 곧바로 지원병을 모집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지원하였는데, 그들 대다수는 농지를 잃고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시민병에게 주는 경비와 지원병에게 주는 급료는 액수에 있어 전혀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도시에 거주하는 실업자가 된 그들은 싼 값에 밀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라도, 어엿한 로마 시민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마리우스는 지원병들과 함께 누미디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전법으로 곧 누미디아의 동쪽 절반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유구르타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채, 마리우스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우스는 로마 민회에 요청하여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임페리움(절대 지휘권)을 받아 전쟁을 계속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마리우스를 도우려고 외교적 재능이 뛰어난 술라각주2) 가 참여하게 되었다. 술라는 유구르타와 연합하여 싸우던 마우레타니아의 보쿠스 왕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 그 뒤 보쿠스 왕은 유구르타 왕을 잔치에 초대한 뒤, 그를 체포해 술라에게 넘겼다.
유구르타가 잡히자 오랫동안 로마를 괴롭힌 전쟁도 마침내 끝났다. 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 1월, 로마에서 열린 마리우스 개선식이 끝난 뒤 처형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로마 밑에서 독립국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기원전 104년 유구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개선한 마리우스는 다시 한 번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이때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집정관에 뽑혔다. 마리우스는 이번에도 대폭적인 군사 제도 개편을 실시하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 부족들과 베르켈라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를 벌여 계속 승리하였다.
베르켈라이 전투
기원전 102년 이동을 시작한 게르만 족의 수는 30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이탈리아를 향하여 계속 이동하였다. 게르만 족은 부족별로 나뉘어, 튜토니 족(유틀란트 반도를 원주지로 한 게르만 족의 일파. 인구 증가로 기원전 2세기경 남하)은 남프랑스의 바다를 따라 서쪽에서, 티그리니 족은 동쪽에서, 킴브리 족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로마에서는 마리우스가 서쪽을 맡고, 카툴루스가 킴브리 족을 상대하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아쿠아에 섹스티아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카툴루스는 그렇지 못하였다.
기원전 101년 봄,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은 포 강을 건너, 토리노와 밀라노 중간 지점의 평원인 베르켈라이에서 키브리 족과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12만 명의 킴브리 족이 죽고, 6만 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로마 군이 크게 승리했다. 그 소식을 들은 티그리니 족은 북유럽으로 도망쳤다.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한 것은 로마 군의 지휘관들이 병력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작전을 잘 짰고, 병사들이 지휘관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움직인 덕이라고 보았다. 이로써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대단히 성공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로 인해 마리우스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관직
· 원로원
포에니 전쟁 이후 원로원의 의석은 300명이었고, 그 뒤에 점차 늘어났다. 원로원의 임기는 제한이 없었다. 원로원은 집정관이 하는 일에 간섭할 수 있었으며,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모든 법률을 무시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집정관
왕정에 왕이 있다면, 로마 공화정에는 집정관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재선이 허용되며 40세 이상만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취임할 수 있었다. 집정관 2명 가운데 1명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정책을 시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집정관은 민회(평민과 귀족이 같이 참여하는 시민 총회)를 소집할 권리가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총사령관으로 군대를 지휘했다.
· 법무관
법무관은 공화정 초기에는 1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에는 16명으로 늘었다. 처음에는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무를 대신했지만, 점점 사법 책임관으로 변화했다.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1년 임기이며, 연령도 40세 이상만 입후보(선거에서 후보자로 나서거나 내세우는 것)할 수 있었다. 또 비상시에는 군대를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
집정관과 법무관은 임기가 1년이라 전쟁 수행 중 임기가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임기가 끝난 뒤에도 전쟁을 계속해야 할 때는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이란 이름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 전쟁이 끝나면 로마 식민지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 독재관
로마 공화정에서 모든 관직은 선거를 통해 뽑았다. 그러나 독재관만은 원로원 회의에서 집정관이 지명했다. 로마 공화정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임명되며, 임기는 6개월이었다. 그렇지만 왕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 호민관
기원전 494년 만들어졌는데, 호민관은 권력 남용(옳지 못하게 함부로 쓰는 것)으로 피해를 본 평민을 돕고 원로원, 집정관, 민회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평민의 대표 격으로, 민회가 아닌 평민회에서 뽑았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 제한은 없었다. 독재관의 결정을 제외한, 집정관과 원로원이 결정한 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2명이었지만 점차 10명으로 늘어났다. 호민관의 임기가 끝나면, 자동으로 원로원 의석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동맹시 전쟁(기원전 91~기원전 88년)
기원전 3세기에 이탈리아를 통일했던 로마는 이탈리아 주변의 도시들과 자발적인 동맹이냐, 전쟁으로 인한 동맹이냐에 따라 차별적인 동맹 규약(한 조직체의 구성과 활동에 관한 규정)을 맺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자치 도시(중세의 유럽에서 국왕이나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얻은 도시)였지만, 실제로는 로마 공화정에 예속(남의 지배 아래 매이는 것)되어 상납금(나라에 세금으로 내는 돈)과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또 로마는 이들 도시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외교 문제에 개입하며 이들을 억눌렀다.
포에니 전쟁과 여러 전쟁을 통해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들 도시들은 로마 군단에 절반 이상의 병력을 제공하며 로마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로마는 이들 도시에 로마가 차지한 부와 권리를 나누어 주길 거부했다. 결국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의 동맹 도시들은 로마에 점차 반감을 갖게 되었고, 계속해서 로마 시민권과 그에 따르는 특권을 요구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개혁가들이 로마 시민권을 이들 도시의 주민에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원로원을 비롯한 지배층은 강하게 반발했다. 기원전 91년 호민관 드루수스는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전체로 확대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귀족은 물론 로마 시민권을 가진 무산 계급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드루수스는 살해당했다.
이 일로 로마 동맹 도시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반란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피첸토 족, 베스티노 족, 마루키노 족, 파엘리노 족, 마르시 족, 프렌타노 족 등 8개 부족이 반란을 시작했다. 동맹 도시들은 자체 연방을 조직해 코르피니움을 중심지로 정하고, ‘이탈리아’라는 국가 이름을 정했다. 또 원로원 의원들과 관리들을 선출했으며, 이와 함께 독자적인 화폐도 주조했고, 육군 10만 명을 양성했다.
기원전 90년 로마는 집정관 루푸스가 북부 전선을 맡고, 카이사르가 남부 전선을 맡아 이탈리아를 치기로 했다. 오랜 기간 로마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이탈리아는 모든 면에서 로마와 같은 군사 체계와 전술을 사용했다. 같은 군사 체계와 전술 때문에 로마는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전쟁 초반 로마는 북부 전선을 맡은 집정관 루푸스가 전사할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차츰 술라의 활약으로 남부 전선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기원전 90년 말, 집정관 카이사르는 정치적 양보만이 이 반란을 저지할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이탈리아 인들을 비롯해 반란에 가담했더라도 즉시 항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조치는 이탈리아 인의 감정을 누그러뜨렸고, 이제 그들은 로마에 대항해 싸워야 할 의미를 잃었다.
그 뒤로도 2년간 남부 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로마 시민권의 확대로 명분을 잃게 된 반란군은 차츰 로마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동맹 부족과 도시들에게 로마와 같은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진정한 반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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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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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구르타 전쟁 · 동맹시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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