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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성지를 되찾기 위해 무기를 들다
십자군 전쟁
발생 | 10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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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291년 |
서유럽 사회의 변화와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로마는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동·서 로마로 나누어졌다. 그 당시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과 훈 족의 계속되는 위협과 중소 자영 농민층의 몰락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 용병 대장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 서로마의 영토 안에는 동고트·프랑크·부르군드·반달 등 여러 게르만 족들의 나라가 들어섰다. 그 가운데 프랑크 왕국만이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그 당시 서유럽에는 로마 교회의 주교가 교황이라 불리면서 로마 가톨릭교가 성립되어 있었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으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카롤루스 대제각주1) 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의 세 손자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분열하였다. 세 나라로 나누어진 뒤 국왕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려고 했다. 그 결과 제후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통치하는 봉건 영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 서유럽 사회는 10~12세기까지 봉건 제도와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안정된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나라 이름을 비잔틴 제국으로 바꾸고, 로마 황제이자 크리스트교의 지배자로 서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도 이민족의 잦은 침입과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 되었다.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꾼 유스티아누스황제(527~565년 재위)에 이르러서야 다시 안정을 찾고, 지중해 지배권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시, 롬바르드 족의 이탈리아 반도 침입과 이슬람 정복자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당시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는 이슬람 제국의 주인은 바로 셀주크 튀르크각주2) 였다. 그들은 11세기 중엽에 바그다드(현재 이라크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를 점령할 정도로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이슬람 제국의 지배자가 되면서,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 되고 말았다.
비잔티움 황제는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되찾기 위해 이들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다. 결국 그 당시 비잔티움의 황제였던 알렉시 우스 1세(1081~1118년 재위)는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년 교황에 선출된 후 1089년 ‘로마 교황청’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교황)에게 원조를 청했다.
동서 교회 지배자들의 갈등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비잔틴 교회의 우두머리를 겸하고 있었다. 726년 레오 황제는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우상으로 생각하여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 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동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가 대립하다가, 1054년에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로 나누어졌다.
성지 탈환의 깃발 아래 서로 다른 속셈들이 모이다
그동안 황제들 때문에 권력자로서의 힘이 약해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그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주장하자, 서방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결국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군’ 이라 부른다.
그때부터 기독교 세력(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셀주크 튀르크)은 예루살렘 성지를 두고 약 2세기 동안 싸웠다.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에 시작하여 1270년까지 총 7차례 전쟁을 치렀다(학자에 따라서는 8차례로 보는 경우도 있음).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여러 세력은 각기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분열된 동서 교회를 통합하여 교황권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영주와 기사들은 새로운 영지와 재물을 얻기 위해 나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동방 세계와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노렸고, 농민들을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십자군의 유일한 성공-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
1096년 각 지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계획했던 기사군이 조직되기도 전에 먼저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자,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 식량을 빼앗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라인 강 근처에서는 유대 인들을 학대하여 비난과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일부 부대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기도 전에 헝가리인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농민군(민중 십자군, 군중 십자군이라고도 함)도 목적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슬람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십자군은 1096년 가을에서야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1차 십자군에는 위그 드 베르망두아(프랑스 왕 필립 1세의 동생)가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고, 툴루즈(프랑스 미디피레네 지방)의 레몽 백작, 로렌(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고드 프루아 드 부용 공작, 부용의 동생 보두앵 백작, 플랑드르(중세에 북해 연안의 저지대 남서부에 있던 공국.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누어짐)의 로베르와 같은 유명한 기사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1097년 니케아(소아시아 북쪽에 있는 도시)를 점령한 다음, 안티오크(지금의 터키 남부 하타이 주의 중심 도시)를 차지 하기 위해 시리아 지방을 향해 전진했다. 그렇지만 이슬람 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병력을 잃었다. 비잔티움 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십자군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다.
심한 더위와 질병, 굶주림 등으로 고생하던 십자군은 내부 세력의 갈등까지 겹치는 바람에 1099년 7월에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십자군은 6주 동안 싸우면서 이슬람 군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승리한 십자군은 예루살렘-라틴 왕국(1099~1187년)을 건설하였고, 보드 앵 백작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 요한 기사단 등 기사 수도회를 설립하여 성지를 방어하게 하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년)은 십자군 전쟁 사상 가장 비조직적이고 잔인했으며, 7차에 걸친 전쟁 중 기독교 세력이 승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1144년 이슬람군이 에데사(예루살렘 동북방에 위치)를 점령하자, 다시 제2차 십자군(1147~1149년)이 결성되었다.
2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등이 참여하여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이 적들에게 속아 부대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 생기고, 내분까지 겹쳤다. 결국 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그 뒤 십자군이 쉽게 출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라는 이슬람 국가를 세운 사람)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공격하였다. 뒤이어 그는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왕들의 전쟁-제3차 십자군 전쟁(1189~1192년)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들은 서방 세계에서는 다시 제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3차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각주3) 황제 프리드리히 1세(붉은 턱수염 때문에 ‘붉은 수염왕’이라 불림),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영국 국왕 리처드 1세(‘사자왕’이라 불림)가 이끄는 군대가 참전하였다 하여 ‘왕들의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왕들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가장 먼저 출발한 프리드리히 1세는 허무하게도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강에 빠져 죽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연합으로 예루살렘 포위 작전을 진행하던 중 불화가 생겨 먼저 귀국해 버렸다. 혼자 남은 리처드 1세는 끝까지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그도 살라딘과 기독교도의 성지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만 맺고 귀국하였다.
소년 · 소녀 십자군 결성-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년)
1198년 새로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빠지고, 주로 프랑스 기사단을 중심으로 제4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202년 베네치아에서 집결한 십자군은 바다 건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십자군의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밀린 선박 이용료를 빌미로, 달마티아(크로아티아 남서부,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지방) 연안을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같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을 파면(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나 직업을 그만두게 함)했다. 그러자 십자군들은 동로마에서 추방당한 아이작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의 제안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교회의 유물과 보물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을 분할하여 라틴 제국(1204~1261년)을 세워 볼드윈(3차 십자군 전쟁 때 큰 활약을 펼침)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테오도루스 1세는 다른 비잔티움 지도자들과 함께, 니케아(아나톨리아 남동쪽으로 64km 떨어진 곳.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로 후퇴하여 니케아 제국을 세웠다.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야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다.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1212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수많은 소년·소녀가 십자군을 조직하여 성지 회복에 나섰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북프랑스의 양치는 소년 에티엔의 이야기를 듣고 모여든 어린이 십자군들은 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를 향했다. 그들이 항해하는 도중에 2척의 배가 난파되어, 그 배에 타고 있던 어린이 십자군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 일부는 마르세유의 못된 상인에게 속아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다행히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 지도자가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700명의 어린이 십자군 노예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종교적 열정보다 앞선 세속적인 욕망-십자군의 몰락
십자군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적인 열정보다는 정치적·경제적인 욕심이 앞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이슬람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5차 십자군 전쟁(1228~1229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헝가리 왕의 지휘 아래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로 가 다미에타(지금의 지중해 연안의 나일 삼각주에 있는 두미아트의 주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이슬람 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카이로로 진격하다 실패하였다.
제6차 십자군 전쟁(1248~1254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1229년 예루살렘을 양보 받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과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엄청난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섰다. 그는 튀니지로 원정하여 시리아까지 진출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국 제7차 원정도 무산되고 말았다.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들의 도시 아콘이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영향
성지를 되찾기 위해 출전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봉건 영주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들은 권력이 강해지고 영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의 각 나라가 중앙 집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의 주축이 되었던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중해 무역권은 뒤를 이은 북유럽, 내륙 무역권 형성과 함께 발전하여 농업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무너트렸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 서유럽 사회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미술, 이슬람의 철학·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이 전해지면서 서유럽 문화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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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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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십자군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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