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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열다
진의 통일 전쟁
서주 시대(西周時代)-주나라의 전성기
기원전 11세기경 희발(주나라 문왕의 둘째 아들)은 국상 강태공의 도움으로 민심을 얻고, 맹진(盟津, 중국 허난성 맹현 남쪽)의 제후(봉건 시대에 왕으로부터 받은 영토와 그 안에 사는 백성을 다스리던 권력자)들을 모아 목야(牧野)에서 은나라 군대와 크게 싸워 이겼다. 그는 은(殷) 왕조 주왕각주1) 을 무너뜨린 후 호경(지금의 중국 산시 성 시안(西安), 다른 이름은 장안)을 도읍으로 삼고, 새로운 왕조 주나라를 열고 무왕이 되었다.
무왕은 희씨 일족(71개 제후국 중 55개 지역이 종친)과 태공망 강씨, 은의 자손을 제후로 봉하고, 그 땅을 상속·지배하게 하여 왕권을 다지는 정치 형태(봉건 제도)를 취했다. 왕과 제후들은 일족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종법’을 존중했다. 이에 따라 제후들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에 참여하여 일정한 비율의 병사와 무기를 제공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주나라는 무왕의 뒤를 이은 성왕, 강왕이 다스리던 기원전 1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지만, 세대가 이어질수록 혈연관계는 무의미해졌다. 이렇게 되자 각 제후들은 주나라 왕으로부터 자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9세기 중엽에 10대 여왕이 공포 정치를 펼치자 대규모의 내란(나라 안에서 정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벌어지는 큰 싸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여왕은 체 로 도망갔고, 소공과 구공이라는 두 재상이 서로 의논하여 정치를 한 ‘공화 시대(共和時代)’ 가 열렸다. 그 뒤를 이은 선왕은 주나라의 부흥을 위해 힘썼지만, 12대 유왕이 미인 포사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였다. 유왕은 포사가 아들을 낳자, 신후 황후와 의구 태자를 폐위시켰다. 그 바람에 쫓겨난 신후 황후의 아버지는 변방의 견융족(중국 산서 지역에 사는 부족)과 합세하여, 수도 호경을 공격하고 유왕을 죽였다.
신후 황후는 다시 여러 제후들과 협력하여 견융족을 몰아내고, 태자 의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가 바로 주나라의 13대 평왕이다. 평왕이 왕위에 오른 후 쫓겨났던 견융족이 계속 주나라를 압박해 왔다. 이에 주나라는 지리적으로 천하의 중심지이고 교통이 편리한 뤄양(洛陽, 중국 허난 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것이 기원전 770년에 있었던 ‘주의 동천(東遷)’이며, 그 이후를 ‘동주 시대(東周時代)’라고 한다.
동주 시대는 크게 춘추 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년. 공자가 편찬한 역사책 《춘추》에서 유래)와 전국 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 유향이 편찬한 《전국책》에서 유래)로 나뉜다.
포사가 웃을 수만 있다면···
유왕이 포국을 토벌하고, 포사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었다. ‘용의 침에서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그녀의 미모에 유왕은 첫눈에 반해 버렸다. 이렇게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지만 포사는 웃을 줄을 몰랐다. 유왕은 의구 태자를 쫓아내고, 포사의 아들인 백복을 태자로 삼고, 매일 비단 100필을 찢게 했지만 포사는 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 중에 실수로 봉화대에 봉화가 올랐다. 봉화는 외적의 침입이나 반란 등 매우 위급한 상황일 때 올리는 신호이다. 봉화를 본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모였으나, 실수라는 것을 알고는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맥을 놓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포사가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하얀 이)를 드러내어 살짝 웃었다. 꿈에서만 그리던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그 다음부터 수시로 봉화를 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제후들도 달려왔지만, 계속 봉화가 오르자 헛고생으로 한 여자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유왕 11년에 신후 황후의 아버지가 호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유왕이 급히 봉화를 올렸지만 끝내 제후들의 구원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패자의 등장-춘추 시대
주의 평왕이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천여 개에 이르렀던 제후국(봉건 시대에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지역의 백성을 지배하는 국가)이 120여 개로 줄었다가, 나중에는 제(齊), 노(魯), 정(鄭), 송(宋), 조(曹), 진(晋), 초(楚), 진(陳), 채(蔡), 연(燕), 위(衛), 진(秦) 등 10여 개로 줄어들었다.
각지의 유력한 제후들은 지역적으로 동맹을 맺고,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토벌함)를 내세워 세력을 키워 갔다. 이렇게 맺은 동맹을 ‘회맹(會盟)’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제후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회의에 붙여 결론을 내리고, 그대로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 회맹을 주재하는 제후들을 패자(覇者)라고 했다.
그중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 5패’라고 불렀는데, 제(齊)나라 환공, 진(晉)나라 문공, 초(楚)나라 장왕, 오(吳)나라 부차, 월(越)나라 구천이 바로 그들이다(일설에는 부차와 구천 대신 진의 묵공과 송의 양공을 말하기도 함).
춘추 5패 중 가장 먼저 패자가 된 제후는 제나라 환공이었다. 환공은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패자가 되어, 기원전 651년 규구(허난 성 개봉의 동쪽)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였다. 이어서 패자가 된 제후는 진나라 문공이다. 처음에 그는 나라 안의 권력 다툼을 피해 위·제·조·송·정·초·진(秦) 등으로 19년 동안이나 방랑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성복(초나라와 송나라의 중간 지점)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토에서 회맹하였다.
초나라의 장왕은 필지(지금의 허난 성 정현 동쪽) 전투에서 진(晋)을 물리치고 패자로서 인정받았다. 그 후 천하의 형세는 진(晋)과 초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546년 송나라 수도에서 회담이 열려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정전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중원각주2) 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졌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제후들이 내세웠던 존왕 사상은 사라지고, 전국 시대의 특색인 실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양쯔 강 남쪽에서 오나라, 월나라가 일어났다. 오나라 합려는 오자서·손자 등이 내놓은 계책으로 초나라, 진(晋)나라, 제나라를 억누르고 월나라를 제압하였다. 월나라 구천도 범려의 계책으로 합려의 아들 부차와 와신상담각주3) 의 복수전을 펼쳤다.
춘추 시대에는 패자라고 해도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강력했던 진(晉)나라가 한(韓)·위(魏)·조(趙) 세 나라로 분리되었고, 남방에서 일어난 초나라가 차츰 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중원의 강국과 국경을 접하기도 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초나라의 장왕이 이름을 떨치자, 중원의 제후들은 ‘존왕양이’를 외치며 결속을 강화하기도 했다.
더욱 격렬해진 7웅들의 패권 다툼-전국 시대
기원전 453년에 한(韓)·위(魏)·조(趙) 세력이 진(晋)나라 땅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그 당시 세력이 약해진 주나라 왕은 그들에게 제후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주나라 왕의 권위는 떨어졌고, 중국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뒤 진(秦)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221년 동안을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
춘추 시대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기 때문에 모든 제후국들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농지를 개척하고 정복 전쟁을 통해 주변을 병합하면서, 서로 국경을 접하는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중 진(秦), 초, 연, 제, 한, 위, 조 7개의 제후가 강력했는데, 이들을 전국 7웅(七雄)이라고 했다. 이즈음 주나라는 겨우 뤄양 주변을 지배하는 작고 약한 세력으로 밀려났고, 힘 있는 제후들은 자신을 ‘왕’이라 불렀다.
전국 시대에는 나라가 커지고 인구가 도시로 모이게 되면서 큰 도시가 생겨났다. 그러자 7웅들은 30만~10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렸고, 실제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10만~6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엄청난 병력 때문에 전쟁의 방법도 바뀌었다.
춘추 시대에는 보통 전차를 중심으로, 2만 명 정도의 군대가 싸움을 벌여 하루나 이틀 만에 전쟁이 끝났다. 그렇지만 전국 시대에는 엄청난 병력 때문에 보병이 중심이 되었고, 기마병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 철제 무기가 보급되고, 쇠뇌(활의 일종, 보통 활보다 더 멀리 쏠 수 있고,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있음)가 발명되면서 진지형(陣地形, 집단으로 모여 전쟁을 벌이는 전법)이 불리해져, 산간 지대에서는 기습 전쟁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전문적인 군사(사령관 밑에서 군대를 운용하며 군사 작전을 짜던 사람)의 역할이 커졌고, 손자와 같은 병법 학자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전국 7웅 중 가장 먼저 패권을 차지한 곳은 위나라였다. 신흥 국가인 위가 가장 먼저 강국이 된 이유는 훌륭한 인재를 적절히 활용한 데 있었다. 또 위는 원래 소금 생산국으로 재정이 튼튼한데다, 관개 공사(농사에 필요한 물을 논밭에 대기 위하여 벌이는 여러 가지 공사)로 농지를 넓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위가 패권을 차지하자, 다른 제후국들도 위를 따라 ‘부국강병’ 정책을 펼쳤다.
제나라 위왕은 유명한 병법가 손자를 군사로 삼고, 그의 계책에 따라 기원전 341년에 마릉(지금의 허베이 성 대명현 남동쪽) 싸움에서 위나라 장수 방연이 이끄는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 이로 인해 위나라는 다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전국 시대에 위왕의 업적으로 더욱 빛난 것은 수도 임치(산둥 성 광라오 현 남부)의 직문(여러 서문 중 하나) 부근에 호화 주택을 지어, 인재를 모아 학문 토론의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사상과 학술을 연구한 학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모여들어 매일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이때 등장한 사상가들을 ‘제자백가’각주4) 라고 부른다.
강국으로 성장한 진(秦)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진(秦)나라도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 개혁을 시행하였다. 효공은 기원전 359년에 법가(덕보다는 법을 중요하게 여겨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주장한 학파)를 중시하는 상앙을 뽑아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상앙은 개인의 토지 소유와 매매의 허락, 농업 장려, 군현제(전국을 군으로 가르고 이것을 다시 현으로 갈라,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을 보내어 직접 다스리던 제도) 실시,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상앙의 개혁 덕분에 진은 빠르게 힘을 키워, 다른 6국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 되었다.
초, 연, 제, 한, 위, 조는 진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지만, 이미 진은 어느 한 나라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때 소진이란 사람이 어느 한 나라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연합하여 진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설(6국이 남과 북, 세로의 관계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을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여섯 나라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게 했다.
그러나 여섯 나라는 각각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동맹군이 진을 공격하다 한구 관(황허 강 남쪽 5km 지점)에서 크게 패하였다. 또 한과 조가 진의 공격을 받아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내자 동맹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 소진은 진이 동맹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려고 장의라는 사람을 진에 들여보냈다. 그러나 장의는 소진을 배신했다. 그는 오히려 여섯 나라는 진과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연횡설(진은서쪽에 있고 나머지 6국은 동쪽에 있어 가로를 잇기에 붙여진 이름)’을 주장하였다. 결국 여섯 나라는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진과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후 진의 계략으로 제와 위가 힘을 합쳐 조를 공격하였다. 이 전쟁으로 6국 동맹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동맹은 깨어졌지만 여섯 나라는 진에게 굴복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연횡책도 깨어지고, 모든 나라는 전쟁을 통해 힘을 키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수백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284년에 진의 소양왕은 연·위·조·초·한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고, 이어 독자적으로 초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했다. 마침내 기원전 256년에 동주를 멸망시켰다.
진(秦)의 정(政), 드디어 통일의 꿈을 이루다
기원전 246년 진나라에서는 장양왕의 아들 정(政, 진시황)이 13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22세(기원전 238년) 때 관례를 치르고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선포한 뒤,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여불위를 내쫓았다.
여불위를 몰아낸 정은 이사를 재상으로, 왕전을 장군으로 뽑았다. 이사는 각 나라에 첩자를 보내 진에서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혼란시켰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 온 초와 한을 끊임없이 공격해, 기원전 230년 한을 무너뜨렸다.
그 뒤 정은 연과의 전쟁으로 약해진 조를 공격했다. 조는 이미 진의 공격이 심해 도읍을 진양에서 한단으로 옮긴 상태였다. 결국 조는 기원전 228년 40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마지막 전쟁을 벌이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의 공격에 위기를 느낀 연의 태자는 형가라는 사람에게 정을 암살해 달라고 부탁했다. 형가는 정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 당시 진에서 도망쳐 온 번오기 장수의 목을 가져갔다. 정은 크게 기뻐하며 형가를 맞이하자, 형가는 이 기회를 노려 정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 정은 연을 공격해 수도를 차지했다.
기원전 225년 정은 황하의 둑을 무너뜨려 위의 수도를 빼앗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수십 만 대군을 보내 초를 무너뜨렸다. 그 뒤 연을 무너뜨린 정은 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내고, 기원전 221년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다.
여불위와 진시황
여불위는 대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왕래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남다른 식견(어떤 일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의 수도 한단(중국 허베이 성 남부에 있는 도시)에 머물 때, 인질로 와 있는 진왕의 손자 자초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여불위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초가 진의 태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여불위는 자초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여불위가 자초를 집에 초대하여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초는 여불위의 첩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여불위는 이 사실을 숨기고 그녀를 자초에게 보냈고, 자초는 그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고 여겨 부인으로 맞았다. 이 아이가 바로 정(진시황)이다.
자초(장양왕)는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를 승상(옛 중국의 벼슬. 우리나라의 정승에 해당)으로 삼았다. 3년 뒤 장양왕이 죽고,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상국(승상보다 한층 높은 이름)으로 삼고, 중보(아버지와 같은 사람)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여불위를 상국의 지위에서 내려오게 한 뒤 지방으로 내쫓았다. 2년 뒤 여불위는 정이 자신의 지위를 점점 약화시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한편 진시황을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유교를 숭상하는 한나라가 법가를 중시한 진나라를 비방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최초의 제국을 이룬 진시황제
왕위에 오른 지26년 만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정(政)은 ‘옛날 삼황오제각주5) 의 공덕(이룩한 훌륭한 일과 존경할 만한 인품)을 혼자 갖춘 왕 중의 왕’ 이라는 의미로 ‘황제’라는 존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신하들이 왕이 죽은 다음에 시호(임금과 높은 관리가 죽은 후에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주는 이름)를 붙이지 못하게 스스로 ‘시황제’라고 시호를 정했다.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 뒤, 강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전국을 군과 현의 행정 구역 단위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해서 다스리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사의 의견에 따라 전국을 36개 군(나중에 4개 군 추가)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을 두어 통치하였다. 각 군현의 우두머리는 모두 중앙 정부에서 뽑아 내려 보냈고, 관직의 대물림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2천 년 동안 왕조는 바뀌어도, 진시황이 실시한 중앙 집권 체제는 계속 이어졌다.
진시황은 수도인 셴양(산시 성 중앙부)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폭 70m에 이르는 두 개의 간선도로(주요 지점을 잇는 중요한 도로)를 만들어 전국을 연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통에 방해가 되는 각지의 성과 요새를 헐어,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 모양의 도로를 만들었다.
또 상업의 발달을 위해 도량형(길이·부피·무게의 단위)을 통일하고, 수레바퀴의 폭도 통일시켰다. 문자도 간편한 전서체로 통일하고, 화폐도 원형으로 만들어 가운데 사각 구멍을 뚫는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했다. 만리장성은 춘추 전국 시대에 연·조 등이 쌓아 놓았던 성벽들을 연결하여 완성한 것으로, 진시황이 모든 부분을 만든 것은 아니다.
진시황의 폭정과 진의 멸망
이렇게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시황제는 ‘폭군’이라고 불릴 만큼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는 불로장생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리하게 대규모 공사를 진행시켰으며, ‘분서갱유’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12만 호를 강제로 이주시키고, 70만 명의 죄수들을 동원하여 ‘아방궁’이라는 목조 대궁전(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과 자신의 무덤인 ‘시황릉’(여산릉. 높이 116m, 주변 길이 2.5m, 사방 600m)을 건설하였다. 아방궁의 제일 큰 방은 1만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고, 시황릉은 세계 역사상 가장 웅장한 무덤이었다. 시황제가 죽은 후 그 무덤에 후궁들도 함께 생매장되었으며, 매장에 관련한 모든 사람이 무덤 속에 갇혀 생죽음을 당하도록 했다.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룬 시황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죽음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 서불(서복이라고도 함)에게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오라며, 소년 소녀 3천 명을 딸려서 동방으로 보냈다. 끝내 약초를 찾지 못한 서불 일행이 일본 쪽으로 도망쳐 버리자, 뒤이어 노생과 후생이 약을 찾으러 떠났지만 역시 구하지 못했다. 그들도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시황제를 비방하면서 도망쳐 버렸다.
나중에 노생과 후생이 자신을 비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황제는 자신을 비방한 자들과 관련된 유생 460명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이 사건을 ‘갱유(坑儒)’라고 한다.
갱유가 일어나기 1년 전, 시황제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면서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는 이사의 말을 듣고, ‘분서(焚書)’를 저질렀다. 법가 사상이나 실용적인 책이 아니면 금서(禁書)로 정해 읽지도, 출판하지도 못하게 하면서 수많은 책을 불살라 버린 것이다. 이 두 사건이 바로 세계 최초의 언론 탄압이라 할 수 있는 ‘분서갱유’이다.
시황제는 지방 시찰을 다니던 중에 기원전 210년, 사구(지금의 허베이 성 광종현)에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진(秦)은 시황제가 죽은 지 4년, 통일을 이룬 지 15년 만인 기원전 206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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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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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진의 통일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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