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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제정의 기초를 닦는 과정에서 로마가 치른 전쟁
갈리아 전쟁과 악티움 해전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8~기원전 64년)
폰투스 왕국(흑해의 남쪽 소아시아 지역의 옛 왕국 이름)의 미트리다테스 6세(미트라다테스 6세라고도 함)는 영토를 확장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로마가 끼어들자, 로마 인을 소아시아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그는 로마가 동맹시 전쟁 때문에 당분간 군대를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원전 91년, 30만에 이르는 폰투스 군은 로마의 속주(이탈리아 반도 이외의 로마 영토)인 페르가몬(고대 그리스 도시)으로 쳐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아시아에 있는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8만여명의 이탈리아 인들이 죽었다. 그 무렵 동맹시 전쟁에 나갔다가 로마에 돌아온 술라는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집정관에 오르자 바로 미트리다테스와 싸우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넘어가자,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여할 병사들을 모집했다. 이때 참여한 군사 대부분은 2년여 동안 술라를 따라 동맹시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이미 술라의 사병이 되어 있었으며 그 규모가 3만 5천이나 되었다.
술라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스로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 그 사이 로마의 정치를 맡았던 킨나가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 추방을 명령했다. 이로써 술라는 더 이상 본국의 원조를 받지 못하고 로마 정규군과도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술라는 기원전 86년, 아테네를 공격해 승리하였고 이듬해에는 폰투스 군과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그 결과 미트리다테스와 다르다노스 조약을 맺어 그로부터 함대를 넘겨받고, 거액의 배상금을 치르게 했다.
그 뒤 술라는 폰투스 군과의 전쟁에 함께한 자신의 4만 군사, 메텔루스 피우스가 거느린 2개 군단, 폼페이우스의 3개 군단을 합쳐 모두 7만 5천명을 이끌고 로마로 돌진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술라는 12만 규모의 로마 정규군과 내전을 치렀다. 마침내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로마로 돌아와 딕타토르각주1) 가 되어 공화정 체제를 강화한 뒤, 스스로 독재관에서 물러났다.
한편 폰투스에서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군사력을 서서히 재건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는 폰투스와 자주 전투를 치렀다. 그러는 사이 기원전 74년에 비티니아(흑해와 폰투스와 맞닿아 있어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중요하지만 불안정한 지점)왕 니코메데스 4세가 죽으면서 유언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기증했다. 로마 원로원이 비티니아를 속주로 만들자, 로마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미트리다테스는 다시 로마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초반에는 로마 집정관인 마르쿠스코타의 패전으로 인해 로마 군이 불리했다. 그렇지만 술라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인 루쿨루스가 기원전 73년에 키지쿠스(오늘날 터키의 발리히사르) 항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폰투스 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이후 로마 군 지휘관들은 미트리다테스를 잡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폰투스 본토를 공격하였다. 그때 로마 군에 패한 미트리다테스는 동맹국인 아르메니아로 피신했다.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미트리다테스를 내어 놓으라는 로마의 요청을 거절하자, 로마는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를 보냈다.
폼페이우스는 2년 만에 전투를 끝내고,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2세를 모두 무찔러 소아시아를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데 성공했다. 이미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동지중해 해적 소탕 등으로 이름을 날렸던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로마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제1차 삼두 정치의 시작과 갈리아 전쟁(기원전 58~기원전 51년)
폼페이우스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로마 원로원은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이 상황을 재빨리 알아차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공이 컸던 기사 출신 부호 크라수스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함께 기원전 60년에 제1차 삼두 정치를 시작하였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곧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진행시켰다. 그 당시 로마는 갈리아의 일부 부족 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이전부터 로마의 동맹 부족이던 하이두이 족이 헬베티 족의 압박을 받고,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이사르가 이 요청을 받아들여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됐다. 그 뒤 카이사르는 7년에 걸쳐 갈리아 전 지역을 손 안에 넣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자 베르킨게토릭스(갈리아 인의 왕이 되고자 했다가 동족에게 살해된 켈틸루스(Celtillus)의 아들)는 로마에 대항하여 갈리아 부족들의 연합을 이끌어 냈다.
카이사르가 다른 속주의 반란 진압에 힘을 쏟고 있을 때,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로마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 맞서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 다른 귀족들의 반대로 베르킨게토릭스는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소규모 군대를 조직하여 게르고비아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주위 다른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또 베르킨게토릭스는 동맹 부족들의 힘 있는 자들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두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휘 통솔권을 유지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즉각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 모든 군대를 정비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 맞섰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군대는 그가 펼치는 전략에 넘어가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승리를 기회로 여긴 베르킨게토릭스는 평원으로 나와 로마 군과 전면전을 펼쳤다. 전면전의 결과는 카이사르의 대승리로 끝났다.
알레시아 공방전과 로마 제정의 준비
전면전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6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알레시아(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 코트도르 주에 있던 고대 도시) 요새로 철수하여 모든 갈리아 부족에게 알레시아로 모이도록 하였다. 카이사르도 알레시아를 포위하고 방책(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운 울타리)을 세워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곧 사방에서 몰려든 갈리아 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결국 카이사르는 안팎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곧 바깥쪽에도 방책을 세우고, 2만 5천의 군대로 10만의 갈리아군과 대치하였다.
기원전 52년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 갈리아 포위군을 모두 물리쳤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 군대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결국 카이사르에 항복하였다. 이것으로 사실상 갈리아 정복 전쟁은 끝났다. 이 전투가 바로 로마가 제국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알레시아 공방전’이다. 그 해 겨울,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7권의 《갈리아 전기》를 책으로 펴냈다. 그리고 기원전 51년에는 전쟁 뒤 남아 있던 문제를 마무리하고, 모든 갈리아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한편 로마에서는 시리아 총독으로 있던 크라수스가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이 카스피 해 남동쪽에 세운 고대 국가) 군과 싸우다 죽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얻은 명성과 무력을 두려워 한 나머지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는 법적으로 갈리아 지휘권이 끝나는 기원전 50년에 원로원의 소환 지시를 받았다. 당시 원로원의 소환 명령을 받은 사람은 군대를 모두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 맞서기 위해 기원전 49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이탈리아와 갈리아의 경계)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 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그리스 등에서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군대와 맞서 싸웠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최후의 전투를 치렀다. 이 둘은 파르살루스(그리스 북쪽 테살리아에 있는 도시)에서 맞섰는데,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크게 승리했다.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기원전 48년에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누나 클레오파트라 7세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47년에 카이사르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의 폰투스 왕국을 되찾으려는 파르나케스 2세의 군대와 싸워 또 승리했다. 이 전투를 마치고 원로원에 보고 할 때,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따르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뒤 기원전 44년에 종신 딕타도르와 임페라토르(고대 로마의 최고의 군 지휘권을 가진자. 황제(emperor)의 유래)가 되었다. 이것으로 카이사르는 사실상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원로원 갈리아를 정복하여 대서양으로까지 로마의 세계를 넓힌 카이사르 회의에 참석하다 공화정을 지키려는 원로원에게 암살당했다.
악티움 해전, 그리고 새로운 황제의 시대로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목한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레피두스,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치를 때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다스렸던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차 삼두 정치가 성립되었다. 권력의 중심에 선 그들은 곧바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세력과 전쟁을 시작했다.
기원전 42년 10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 주동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완전히 제거했다. 또 기원전 36년에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의 아들)를 무찔렀다.
이 틈에 세력을 키운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력으로 대항하려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야간 기습 작전에 패하여 군대 지휘권을 빼앗기고 은퇴하였다. 이렇게 2차 삼두 정치가 무너지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패권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의 서부를 맡아 통치하였고,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맡았다.
처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카이사르가 남긴 유산 때문이었다. 엄연히 카이사르의 상속권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있는데도,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하자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동생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되돌아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보병 10만 명, 기병 1만 2천 명과 800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기원전 32년, 코린트만 입구에 있는 악티움(그리스 북서부의 안부라키아만 앞에 있는 반도)에 진지를 세웠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이듬 해 봄에 보병 8만 명, 기병 1만 2천 명, 군함 400척의 군대를 움직여 악티움 북부에 진지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수개월간 양 진영은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몇 달 뒤, 안토니우스는 동맹 세력 일부가 진지에서 빠져나가고 보급품도 모자라게 되자 전투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싸우는 것보다 바다가 유리하다고 생각해 함대를 동원했다. 먼저 안토니우스가 배들을 이끌고 만을 빠져나갔고, 클레오파트라의 소함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함대를 이집트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도 나머지 함대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랐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 버림받은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이듬해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둘은 자살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공로로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자)’와 ‘프린켑스(제1인자)’ 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공화정을 유지한 채, 실제로는 제정(황제가 다스리는 군주 제도의 정치)을 시작하였다. 이것으로 로마는 공화정 국가가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로마 병사가 사용한 글라디우스
글라디우스(Gladius)는 라틴 어로 ‘검’이라는 의미이지만, 통상적으로는 로마 보병이 사용하던 총 길이 50~70cm의 양날 검을 의미한다. 칼집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고, 오른쪽 허리에 찬다.
기원전 7세기부터 로마에서는 베기와 찌르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비교적 긴 검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긴 검은 로마의 밀집 전투 대형에서 사용하기가 어려웠고, 공격자의 몸을 방패 밖으로 노출시키는 단점이 있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2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를 위해 싸운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 족 용병으로부터 전래된 짧은 검이 표준적인 로마 검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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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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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갈리아 전쟁과 악티움 해전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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