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는 세계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의 주인,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 했던 테무친
몽골 족각주1) 은 중앙아시아 북부(지금의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의 거친 땅에서 사냥과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인내심이 강하고 용감하였으며, 기마술이 뛰어났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민족이었다.
12세기 서방 세계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고,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금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밀려 임안(지금의 저장 성 항저우)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당시 타타르(동쪽), 케레이트(중부), 메르키트(북쪽), 나이만(서쪽) 등이 몽골 부족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각 부족은 부족 국가를 형성하면서 칸(汗, 부족 사회의 족장이나 국왕을 호칭하는 말, 동북아시아 민족 사이에서는 군주를 부르는 공통어로 쓰임)에는 올랐지만, 부족 전체를 통일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데는 부족간의 갈등을 계속 부추겼던 금나라의 영향도 컸다.
금나라 세력이 약해진 13세기 초, 몽골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혼란스러웠던 몽골 족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이루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칭기즈 칸이다.
어릴 적 이름이 테무친이었던 그는 몽골 족의 하나인 보르지긴 마을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당하고,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부족 사람들과 경쟁 부족들의 공격으로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타이치오트 족의 공격에서는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메르키트 족에게는 아내 보르테를 빼앗겼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테무친은 언젠가는 다시 부족을 통합하고 다른 부족들을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몽골을 통일하고 칸에 오르다
성인이 된 테무친은 아직 자신의 힘만으로는 강력한 메르키트 족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에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 족의 완 칸인 토그릴과 어릴 적 친구인 자다란 족의 자무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 부락을 습격하였다. 그는 이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메르키트 족 300여 명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어 자신이 타타르 족을 공격하러 간 사이, 자신의 재산을 약탈한 주르킨 족을 공격하였다. 이때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고, 평민들은 병사와 노예로 삼았다. 1189년 보르지긴 부족의 칸의 자리에 오른 테무친은 자신의 원수였던 타타르 족을 공격하여,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아이들만 살려 두었다.
그 해 테무친은 쿠릴타이(몽골 족의 부족 연맹 회의)의 맹주에 추대되면서 칭기즈 칸각주2) 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날로 높아만 가는 칭기즈 칸의 명성을 두고 보지 못한 의형제 자무카가 칭기즈 칸을 공격하여 그의 부하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칭기즈 칸은 이번에도 완 칸과 손을 잡고 자신을 배신한 자무카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몽골을 통일하려는 칭기즈 칸은 완 칸과 동맹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는 걸 알고, 그 당시 많은 부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완 칸을 공격하였다. 이때 칭기즈 칸에게 크게 패한 완 칸은 나이만 족 진영으로 도망쳤지만, 그 부족의 병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 나이만 족이 먼저 공격해 왔지만, 칭기즈 칸은 그들을 물리치고, 1204년에 모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1206년에 칭기즈 칸은 마침내 몽골 제국의 대 칸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 칸은 기존의 부족이나 가문 중심의 씨족 공동체를 해체하여 천호제(일종의 군사 행정 조직으로 십호, 백호, 천호를 편성한 제도)로 바꿨다.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뽑았다. 또 자신에게 가장 충성하는 군사들만을 뽑아 케시크테이(몽골 최강의 친위대. 기마병으로 구성됨)를 만들고, 케크테이에 뽑힌 친위 대원들은 쿠릴타이의 정식 구성원으로 삼았다. 칭기즈 칸은 케시크테이를 구성한 뒤, 누구도 감히 그에게 도전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오랜 원한 관계를 청산하고 참모를 얻다
몽골 군을 정비한 칭기즈 칸은 몽골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서쪽 오이라트(유럽에서 몽골계의 한 부족인 칼무크 족을 이르는 말)와 키르기스 족(몽골 고원 북서부의 예니세이 강 상류에 살던 터키 민족)을 정복한 다음 서하(지금의 간쑤 성, 산시 성에 있던 티베트 계 탕구트 족 국가)와 싸워 승리하였다.
1211년 칭기즈 칸은 그동안 몽골과 오랜 원한 관계였던 금나라를 치기 위해 나섰다. 그는 금나라의 수도 옌징(연경. 지금의 베이징)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1214년 금나라로부터 말 3천 필과 남녀 각 500명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금나라의 옌징은 1215년에 결국 몽골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요나라 왕족 출신의 지략가 야율초재를 만났다. 야율초재의 뛰어남을 알아본 칭기즈 칸은 그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제의하였다. 야율초재는 뛰어난 지략으로 칭기즈 칸의 신임을 받는 참모가 되어 서역(중국인이 중국의 서쪽 지역을 모두 가리키는 데 사용한 이름) 원정에 함께했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몽골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슬람 왕국 호레즘을 정벌하다
1218년에 칭기즈 칸은 상업의 중심지였던 호레즘(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야 강 하류, 아랄 해 남쪽 지역에 있는 이슬람 왕국. 수도는 사마르칸트)과 교류를 하기 위해 낙타 500마리와 값비싼 물건들을 실은 대상의 무리를 그곳으로 보냈다. 그러나 호레즘 왕국의 입구인 오트라르(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 성주가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상인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재물은 약탈당했다. 이에 칭기즈 칸은 다시 호레즘의 왕 무하마드에게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사신마저 수모를 당하고 겨우 도망쳐 돌아왔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칭기즈 칸은 호레즘을 공격하였다.
1219년에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호레즘의 변방인 오토라르에 도착한 칭기즈 칸은 첫째 아들 주치, 둘째 아들 오고타이, 셋째 아들 차가타이에게 각 부대의 지휘를 맡겨 오트라르의 입구와 좌·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넷째 아들 툴루이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중앙으로 향했다. 정면 대결 대신 지구전(적을 지치게 하기 위해 빨리 결판을 내지 않고 오래 끄는 싸움)을 펼친 몽골은 5개월 만에 오토라르를 함락시키고, 수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있는 도시)로 원정군 모두를 집합시켰다. 사마르칸트에는 투르크 계, 이란 계 등으로 구성된 4~5만의 정예군이 있었지만, 야율초재의 뛰어난 전략과 몽골 군의 공세에 밀려 5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칭기즈 칸은 사마르칸트를 비롯하여 점령한 모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수많은 남자를 죽였으며 여자와 어린아이는 모두 포로로 삼았다.
1220년에 호레즘을 정복한 칭기즈 칸은 군대를 나누어 정복 전쟁을 계속하였다. 일부는 카프카스 산맥(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산맥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룸. 코카서스 산맥이라고도 함)을 넘어 남러시아를 공격하여 크림 반도(우크라이나 남부에 있는 반도)에서 볼가 강(러시아 서부에 위치, 유럽에서 가장 긴 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일부는 인도 쪽으로 가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바미안(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주민을 모두 학살했다.
7년에 걸친 중앙아시아 대원정을 마친 칭기즈 칸은 1225년에 큰 아들인 주치만 흑해 부근에 남겨둔 채 개선하였다. 몽골로 돌아온 그는 넓은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준 뒤, 1226년에서 1227년까지 서하를 상대로 한 마지막 원정길에 나섰다가 간쑤 성(중국 서북 지구 황하 상류에 있는 성) 근처에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완성하다
칭기즈 칸은 큰아들 주치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 바투에게 가장 먼 남러시아 일대를 주었고(1243년에 킵차크한국 건설), 둘째 차가타이에게는 호라즘의 옛 영토를 주었으며(1229년 차가타이한국 건설), 셋째인 오고타이에게는 옛 나이만의 영토를 주었다. 그러나 넷째 아들 툴루이만은 최후까지 영토를 분배 받지 못한 채, 칭기즈 칸과 함께 몽골 제국을 다스렸다. 칭기즈 칸이 죽은 뒤, 1229년 몽골 족의 지도자들은 쿠릴타이를 열어 오고타이를 2대 대 칸(태종)으로 선출하였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안으로는 제국을 완성 하기위해 노력했고, 밖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1234년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때 고려가 금나라와 손잡는 것을 막기 위해 살리타를 시켜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또 1236년에는 본격적인 유럽 원정에 나서, 원정군 총사령관에 바투를 임명하여 서방으로 진격하게 했다. 바투가 이끄는 원정군은 모스크바 공국을 점령하고, 러시아 최대 도시인 키예프까지 손에 넣은 뒤, 폴란드를 지나 독일의 슐레 지엔(지금의 폴란드 영토)까지 점령하였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무너뜨리고 오스트리아로 향하던 바투는 오고타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 칸의 자리를 둘러싼 갈등
몽골 본국에서는 오고타이가 죽은 뒤 대칸의 자리를 놓고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가 3대 대 칸(정종)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3년 만에 죽어 버렸다. 이때 부족의 제일 연장자가 된 바투는 툴루이의 큰 아들 몽케를 4대 대 칸으로 앉히기 위해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의 일족이 바투가 소집한 쿠릴타이에 응하지 않아 회의가 무산되었다.
다음 해인 1251년 바투와 몽케 일파는 다시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를 4대 대 칸(헌종)으로 옹립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오고타이 일파는 케룰렌 강(몽골 북동부를 흐르는 강) 상류로 군사를 보냈다. 그러나 툴루이 일파에게 당해, 실패하고 본토에 있는 땅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1259년 남송을 공격하던 몽케가 쓰촨(양쯔 강 상류에 있는 지역)에서 죽자, 몽케의 첫째 동생인 쿠빌라이는 1260년에 5대 대 칸(세조)에 오른 뒤 1271년에 원(元)나라를 세웠다. 몽케 칸이 죽기 전 1258년에 셋째 동생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그곳에 일한국을 세웠다.
쿠빌라이가 대 칸에 오르면서 대 칸 자리를 둘러싼 지도층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칭기즈 칸의 세계 정복의 꿈은 거기서 막을 내리고, 몽골 제국은 원 왕조와 4대 한국(킵차크·차카타이·오고타이·일한국)으로 각자 독립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