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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사 로마, 제국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다
포에니 전쟁
발생 | 기원전 2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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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기원전 146년 |
지중해를 둘러싼 피할 수 없는 충돌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에게 문명이 쇠퇴하고 폴리스들이 등장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 서남쪽 티베르 강(이탈리아 중부에 흐르는 강. 현재 테베레 강) 지역에서는 로마라는 도시 국가가 건설되어 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트로이의 용사 출신인 아이네아스의 자손인 로물루스(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건국 신화의 주인공)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로마는 주변에서 가장 강력했던 에트루리아각주1)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라티움(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는 지역) 지역의 유일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 남쪽 삼니움 족과 여러 차례 전쟁(기원전 326~기원전 290년)을 치른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던 그리스의 식민 도시 국들을 통합한 것은 그리스 인들이 누볐던 해상 무역 시장을 이어받아 서지중해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지중해 최고의 부를 누리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288년경 시칠리아 섬(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의 시라쿠사(시칠리아 섬 최초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마메르티니(고대 이탈리아 지방의 오스크 인 용병)들의 반란을 계기로 로마와 카르타고는 3차례에 걸쳐 100년이 넘도록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146년)이다.
카르타고의 생성과 번영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북쪽(지금의 튀니지) 해안에 페니키아 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이다. 페니키아가 멸망한 뒤 기원전 800년경에 독립국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막대한 부와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덕에 에스파냐에서 시칠리아 일부 지역까지를 지배하면서 상업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카르타고 사람들은 군사 문제를 주로 용병에게 맡겼다.
로마 인들은 카르타고 인을 포에니(페니키아 인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264~기원전241년)
시라쿠사의 용병 대장은 해고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마메르티니들을 이끌고 메시나를 점령한 후 주변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 시라쿠사의 히에론 2세의 반격을 받게 되자,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카르타고 군이 시라쿠사 군을 물리치자, 마메르티니들은 그들을 도와준 카르타고 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번에는 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 도시들에 대한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기원전 264년에 전쟁에 개입하였다.
전쟁 초기 로마는 해군이 강한 카르타고에 밀렸지만, 차츰 해군력을 키우고 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무기를 만들었다. 그 뒤 로마는 메시나를 공격해 카르타고 군을 몰아냈고, 시라쿠사도 점령했다. 그 기세를 몰아 로마 장군 레굴루스는 기원전 256년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카르타고 용병 대장 크산티포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코끼리를 중심으로 한 군대의 공격에 무너졌다.
그러나 강해진 로마의 해군은 계속 승리하였고, 마침내 아이가테스 해전(기원전 241년)에서 카르타고 사령관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싸워 카르타고를 항복시켰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내어 줬을 뿐 아니라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 뒤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해외 속주(프로빈키아.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설치된 이탈리아 반도 이외의 로마 영토)가 되었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1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았다. 그리고 카르타고에게 더 많은 전쟁 배상금을 내라고 강요했다. 이때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아들 한니발, 사위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반도(유럽의 남서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반도)에 ‘신카르타고’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에 있던 사군토의 옛 이름)을 차지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철수를 요구했지만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를 향해 다시 선전 포고를 했다.
로마가 이미 바다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4만에 이르는 군사(코끼리 포함)를 이끌고 육로로 피레네 산(에스파냐와 프랑스 경계)과 론 강(스위스에서 시작해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로 흐르는 큰 강)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계속되는 행군과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잃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정도만 남았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 사는 갈리아 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기묘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 덕에 군대는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 군을 격파하고 승리하였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에 전투(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으로 유명한 전투)에서 로마 군을 이중 포위하여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 동맹을 게릴라 전술(배후나 측면을 소규모의 군사가 기습 공격함으로써 적을 교란시키는 방법)과 외교 활동으로 교묘히 저지하였다. 기원전 211년 로마가 카푸아 시를 되찾을 때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군의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로마 군은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로마 군의 스키피오(자마 전투 승리 후 아프리카누스란 칭호를 얻었음)는 기원전 206년 카르타고 군의 근거지로 건너가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평정했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4년에 카르타고의 본토를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전투 준비를 했다. 그때 남부 이탈리아에서 로마 군과 대치 중이던 한니발은 본국의 명령을 받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로마 군의 스키피오는 기원전 202년에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과 맞대결을 펼친 결과 또 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2차 전쟁에서도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 히스파니아(에스파냐)를 비롯한 지중해 섬들을 양도(어떤 물건이나 권리를 남에게 넘겨주는 것)하고, 전함 대부분을 넘겨주었으며, 50년간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기원전 146년)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온 시민이 힘을 모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또다시 로마의 신경을 건드렸고, 로마는 카르타고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 무렵 카르타고 서쪽의 누미디아 국왕이 카르타고의 영토를 침략했다.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맺은 강화 조약의 내용에 따라, 로마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누미디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말았다.
이것을 빌미로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또 다른 스키피오(스키피오는 고대 로마의 성. 로마사에는 여러 명의 스키피오가 등장함)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로마는 더 이상 카르타고가 일어설 수 없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카르타고의 수도를 완전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이때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로마의 노예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에 완전히 멸망하였고, 그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차례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일개 도시 국가에서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
1.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2차 포에니 전쟁 중 이탈리아 동남부의 칸나에 부근에서 로마 군과 카르타고 군 사이에 벌어진 큰 전투다. 이 전투에서 로마 군은 갈리아·히스파니아·아프리카 동맹군의 지원을 받는 한니발 부대에 크게 패했다.
로마 군은 서남방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아우피두스 강(오판토 강)을 따라 후방으로 바다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약 6천 명의 기병을 양 날개에 배치하고 보병을 중앙에 밀집시켜, 적군의 중앙을 힘으로 밀어붙여 파괴할 생각이었다. 여기 맞서서 한니발은 유명한 초승달 모양의 진을 선보였다. 그는 갈리아와 에스파냐 보병을 중앙에 놓고, 아프리카 부대를 둘로 나누어 그 양옆에 배치하고, 기병대를 양 날개에 포진시켰다. 그러나 적군과 교전을 벌이기 전에 전열을 초승달 모양으로 바꿔, 중앙이 전진해 가는 데 따라 양옆의 아프리카 부대는 사다리꼴 대형을 이루었다. 한니발이 예상했듯이 그의 기병대는 양 날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일부가 적군의 배후로 밀고 들어갔다.
한편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중앙군을 점점 밀어붙였다. 한니발의 부대는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흩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 군의 중앙부가 점차 덫에 끌려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고, 한니발의 초승달 대형은 이제 원으로 바뀌었다. 밀고 들어오는 로마 군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프리카 부대가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들을 공격했고, 카르타고 기병대가 뒤쪽을 쳤다. 빽빽하게 밀리는 바람에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로마 군은 포위된 채 죽어 갔다. 겨우 1만 4천 명의 로마 병사들이 달아났을 뿐, 1만 명 이상이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살해당했다. 이에 비해 카르타고 군은 약 6천 명의 병력만 잃었다.
2. 자마 전투(기원전 202년)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군이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로, 2차 포에니 전쟁 최후의 전투였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는 나라가라(지금의 튀니지 사키야트시디유수프)에서 벌어졌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자마라는 명칭은 전투가 벌어진 지 약 150년 뒤, 로마의 역사가 네포스가 그 전장을 지칭하여 붙인 것이다.
기원전 203년에 카르타고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32km도 안 되는 지점에서 중요한 승전을 거둠에 따라,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과 그의 동생 마고는 교착 상태에 빠진 이탈리아 원정에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한니발의 정예 부대를 마시니사(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의 통치자)의 기병대가 공격하고, 이어 로마 보병대와 기병대가 협공을 하자 카르타고 보병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 2만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지만, 로마 군은 전사자가 1천5백 명에 그쳤다.
자마 전투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수락했다. 스키피오는 이 승리에 따른 찬양의 표시로 ‘아프리카누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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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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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포에니 전쟁 –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 정미선,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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