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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증가하고 경제활동이 부활함에 따라 여러 공국이 형성되었다. 그중의 하나인 파리와 오를레앙을 축으로 한 일드프랑스는 새로운 프랑스 왕국의 핵심이었다. 이 왕국은 카페 왕조의 프랑스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3세기에 와서는 근대 프랑스의 영역에 맞먹을 정도로 팽창했다.
중세 초기 노르만족(바이킹)의 파괴적인 침입으로 대제후들은 그들이 상속한 관직·영지·봉토 등에 교회의 토지를 보호령으로 추가함으로써 대공국을 건설하고, 혼인을 통해서도 새로운 영지를 획득했다. 이러한 공국의 토지 관리인은 단순한 관리인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고유의 권리를 행사하는 봉건 주군이었다. 이리하여 9세기의 통합된 제국으로부터의 권력의 분산 현상은 11세기에 완료되었으며, 이러한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를 봉건제도라고 한다. 봉건 주군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의 군사적 봉사에 의존하며, 봉신은 그 대가로 불입권을 가진 봉토를 받는다. 이러한 봉토는 수없이 증가했으며, 권력의 세분화를 가져왔다.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크게 침체되었던 교회도 갱신되었으며, 클뤼니 수도원이 910년에, 시토 수도회가 12세기에 창건되었다.
정치권력의 분산으로 국왕은 오랫동안 대제후들과 대립하고, 동맹을 맺거나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아르 강 이북에서 왕령지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했던 지역은 플랑드르·노르망디·앙주·브르타뉴·블루아샹파뉴·부르고뉴였다. 루아르 강 이남에서는 프로방스·오베르뉴·툴루즈·바르셀로나·아키텐이 유력했다. 프랑스 왕국의 직접적 기원은 843년에 대머리왕 샤를에게 할당된 서프랑크 영토였지만 987년에 위그 카페(987~996 재위)가 왕으로 선출될 때까지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이지 않았다.
위그 카페의 아들 로베르(996~1031 재위)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로베르는 물론 그의 후계자들도 실질적으로는 왕관을 쓴 봉건 제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국왕의 위신은 점차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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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랑스의 탄생과 발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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