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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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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최대 관심사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전비 및 재건에 관한 재정문제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배상금 지불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그 의무를 거듭 이행하지 않았다.

1923년 당시 총리였던 푸앵카레는 프랑스 군대와 기술자를 루르 강 유역에 진주시켜 독일로 하여금 배상금을 물게 하거나 직접 징수하려 했다. 독일은 1924년에 개정된 도스안에 동의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루르 점령군도 철수했다.

1924년 푸앵카레가 영도하는 우익의 '국민 블록'이 '좌파연합'에 패했다. 1924~26년에 좌파 연합은 재정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푸앵카레가 복귀했다. 푸앵카레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유화'정책으로 평화를 추구했다. 로카르노 협약(1925)으로 독일은 현존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선을 무력으로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배상금에 관한 새로운 수정안이 1929년에 성립되어(영 안) 독일은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고, 1930년 프랑스는 라인란트의 점령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으며, 1931년에는 프랑스도 그 와중에 휩쓸렸다. 독일 나치의 흥기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우익 세력의 선동이 있었으나 좌익의 행동 통일로 저지되었다. 1935년에는 '인민전선'이 형성되었고, 이듬해의 선거에서 승리하여 레옹 블륌이 총리가 되었으나 1937년에 그의 내각이 붕괴 되었다.

1935년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1936년 3월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는 프랑스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1938년 3월에는 히틀러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로 진주하여 새로운 위기가 조성되었다. 다음해 3월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송두리째 병합했는데 그의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1939년 4~8월에 프랑스와 영국은 소련을 대(對) 히틀러 공동전선에 합류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소련은 오히려 히틀러와 협약을 맺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이틀 뒤인 9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하여 내키지 않는 선전포고를 했다. 폴란드를 함락한 후 히틀러가 제안한 강화는 서방의 연합국에 의해 거절되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진격하여 스당 근처의 프랑스 방위선을 돌파했다. 6월 10일 독일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프랑스 정부는 투르로 떠나고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했다. 페탱 내각이 조직되고 6월 22일에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의 형식적인 주권은 인정되었으나 국토는 독일군의 점령지역과 비점령지역으로 분할되고 프랑스는 독일군의 점령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프랑스-독일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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