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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는 일단 사회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파로 연립내각을 구성했으나 1923년 파시스트 돌격대의 설립, 민족주의 정당과의 합동, 최다득표 당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 등으로 강권 통치를 준비했다.
전쟁 후의 사회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산층의 지지로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는 새 선거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총투표수의 2/3를 획득할 수 있었다. 자신을 얻은 파시스트는 PSI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를 암살해 여론의 비난을 샀다. 이후 1925∼29년 파시스트 노조를 제외한 모든 노조의 해산, 파시스트 대평의회에 의한 의회의 실질적 폐기, 반대파 정당의 해산, 정치범 특별 재판소의 설치 등 파시스트 독재가 이룩되었으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독일의 나치즘에 미치지 못했다. 초기의 급진적 색채를 벗고 이미 대자본과 왕의 지지를 확보한 무솔리니는 협동조합 노선(1926)으로 노동자의 통합을 꾀하고 바티칸을 교황 치하의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1929)으로 역대 정권의 숙제였던 교회와의 화해에 성공했으며, 1929년 이래의 대공황기에는 경제의 국가 관리를 일층 강화, 일당국가체제를 굳건히 했다. 한편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에 나선 무솔리니는 국제연맹의 경제제재에 직면했으나 이를 기회로 가난한 나라 이탈리아의 설움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한편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에 접근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에 대한 공동개입으로 독일과 한층 가까워진 이탈리아는 이듬해말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에 가담한 데 이어 1939년 독일과 강철협정을 맺음으로써 이미 군비를 완료한 히틀러의 전쟁계획에 말려들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에 참전했으나 군비 부족으로 에티오피아와 그리스의 전선에서 퇴각을 거듭하다가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로마 폭격이 시작되자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며칠 후 국왕과 군부 및 파시스트 평의회 일부가 연합,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정부불신임안을 가결하고 무솔리니를 체포했다. 이어서 바돌리오 원수의 새 정부는 9월 연합군에 항복했으나 이탈리아에 독일군이 증강되자 연합군의 점령지역으로 피신했다. 나폴리 이북을 점령한 독일군의 손에 구출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공화국을 재건, 정권의 연명을 꾀했으나 10월 반파시스트 연립정권의 대(對) 독일 선전포고와 더불어 각지의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해졌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로마를 해방시킨 데 이어 파르티잔의 손에 북부 도시들이 해방되고 도피중의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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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파시스트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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