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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탈리아 왕국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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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카보우르가 죽은 후 국정을 담당한 것은 온건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우파 정부였다. 통일 초기의 최대 과제는 바티칸 문제와 남부 문제로서 국가의 형식적 통일에 이은 국민의 실질적인 통합이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신생 이탈리아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도들에게 국정에 협력하지 말도록 종용하고 있었고 남부에서는 통일로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한 빈농들이 비적이 되어 구(舊)부르봉 왕가의 비호 아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에 우파 정부는 북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의 강행으로 대처했다. 북부에 유리한 자유무역제와 간접세가 전국에 확대되자 부르봉 왕가의 보호주의 아래에 성장한 남부 공업과 빈농이 큰 타격을 입어 통일에 대한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4∼5년간 이어진 남부의 내란은 리소르지멘토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우파 정부는 이러한 남부의 희생과 외자 도입으로 북부 공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한편 1866년에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최종적으로 몰아냈고 1870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틈타 로마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일부 국경지대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되어 1820년대 카르보나리의 반란에서 시작된 리소르지멘토는 일단락되었다.

이듬해 정부는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기고 내정에 주력하려 했으나 우파의 더딘 개혁에 대한 실망으로 공화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좌파가 급부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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