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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피의 뒤를 이은 루디니의 우파 정권은 크리스피 시대의 계엄령 체제를 완화하려 했으나 1898년 흉작과 불황으로 밀라노에서 폭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자 다시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이에 1892년에 창당된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입헌 좌파가 손잡고 반격에 나서 우파 정부의 퇴진을 가져왔다. 1900년 국왕 움베르토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고 이듬해 새 국왕 에마누엘레 3세의 위촉으로 좌파의 차나르델리가 정권을 맡게 됨으로써 이탈리아 사회를 뒤흔들었던 세기말의 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차나르델리 내각의 실력자인 내무장관 졸리티는 1903년 총리가 된 이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피에몬테 출신인 그의 정책 기조는 크리스피와 같은 강권과 탄압 대신 자본가에게는 노동자에 대한 양보를 종용하고, 사회주의 세력에는 개량주의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사회당 혁명파와 분리시키려는 졸리티의 노동운동 장려정책에 힘입어 이 시기에는 파업이 일반화되었다. 빈발하는 파업의 수습에 몰린 졸리티가 일시 퇴진하고 포르티스·손니노 내각이 잇따라 등장했으나 단명으로 끝나 1906년 다시 졸리티가 복귀했다.
졸리티의 3차 내각은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드물게 보는 장수 내각(3년)이었다. 1900년 이래의 호황을 배경으로 한 졸리티의 노동자·자본가 연합노선 아래 정부는 건전재정을 유지했고 임금향상으로 노동자의 생활수준도 나아졌다. 피아트 자동차공장으로 대표되는 북부의 대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남부 문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는 남부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남부에 대한 얼마간의 지원책이 마련되었다. 또한 매년 50만 명에 달하는 이민은 농업의 과잉인구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교회는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개혁에 관심을 보이고 의회에도 진출해 1905년에는 가톨릭교도의 참정을 금지하는 교황의 칙령이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도 개선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점차 불황과 독점의 진행으로 졸리티에 대한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09년말 사임한 후 1911년 제4차 내각을 조직한 졸리티는 사회당 개량파에게 입각을 요청했으나 PSI 지도자 투라티는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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