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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파리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미수복 지역을 돌려받기는 했으나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은 피우메를 얻지 못해 전후의 베르사유 체제에 불만이었다. 윌슨의 냉대에 항의하여 평화회의에 참석중이던 이탈리아 대표단이 철수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다는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이 널리 퍼지는 가운데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투 파쇼(Fasci di Combatimento)가 결성되었다. 시인이며 정치가인 단눈치오는 9월에 의용대를 이끌고 달마치야 연안에 상륙, 유고슬라비아와 분쟁중이던 피우메를 점령해 1년 남짓 통치하는 일막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쟁의 영향은 이탈리아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국민총동원의 전쟁을 거친 대중의 정치 의식은 한껏 높아져 있었으나 전시공채의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제대병들의 대량 실업 등으로 정국은 위기 를 맞고 있었다. 비례대표제의 새 선거제도로 치러진 11월 총선에서 제1당이 된 PSI와 농촌에 기반을 둔 가톨릭의 신생 인민당이 대중 정당으로 부상해 구지배구조를 위협했다. 전쟁 직후의 니티 내각에 이어 1920년 정권을 담당한 졸리티에게 그해 4월 토리노의 금속노동자 파업이 발단이 되어 피에몬테 주 전역에 총파업이 파급되었다. 이어서 9월 이 지역 노동자의 공장평의회가 중심이 된 공장점거사태가 일어나는 등 시련이 닥쳤으나 졸리티는 노련한 조정으로 혁명의 파고를 막는 데 성공했다. 더 큰 시련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로부터 왔으나 당시까지도 졸리티를 포함한 지배층은 파시스트의 위협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중산층 이상의 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즈음 좌파 조직에 대해 시작된 파시스트의 공격을 묵인했다. 반동의 물결이 높아가던 당시 보르디가의 주도하에 그람시·톨리아티 등을 포함한 혁명파는 1921년 1월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을 창당, PSI 및 노동총동맹(CGL)과 결별하게 되었다. 파시스트가 처음 의회에 진출한 5월 선거에서 중도 연립정부 수립에 실패한 졸리티에 이어 들어선 보노미 내각, 이듬해의 팍타 내각은 무능한데다 파시스트의 방화·파괴 행위를 방관할 뿐이었다. 1922년 7월 파시스트의 테러에 맞서 일어난 최후의 총파업은 국민의 호응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고 파시스트의 총동원령을 불러일으켰다. 10월 나폴리에서 열린 파시스트 당 대회를 마친 후 '로마에 진군한' 파시스트를 해산시키기 위해 팍타는 계엄령의 서명을 국왕에게 요청했으나 파시스트에 호의를 가진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조각(組閣)을 위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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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후의 위기와 파시스트의 진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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