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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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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3,155,000명 (2023년 추계) |
면적 | 181.67㎢ |
언어 | 이탈리아어 |
대륙 | 유럽 |
국가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 밀라노 주의 도시이자 주도.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수도로 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밀라노는 티치노 강과 아다 강 사이에서 광활한 평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 유역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현재는 광범위한 도로·철도·통신망과 지리적 위치를 갖추고 있는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이다.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수도로 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밀라노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경제중심도시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통일국가 성립 이후 경제·문화·사상의 분야에서 선두적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밀라노 시민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지역주의에 근거하여, 또한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특성을 들어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라노가 로마에 밀려 제2의 도시로 된 데에는 로마의 역사적·신화적 상징성,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문예부흥의 흡수·통합, 고전적 도시경관을 선호하는 경향 등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연·인문 환경
밀라노는 티치노 강과 아다 강 사이에서 광활한 평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 유역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고도 122m에 위치하며, 북쪽은 거대한 알프스의 남쪽 사면과 접하고 있다. 반원형의 산지에 싸인 북쪽에는 건조지역이, 포 강 가까이에는 습지 초원과 벼농사 지대가 펼쳐진다. 일찍이 주민들은 남쪽의 세베소·니로네·람브로·올로나 강들의 작은 수로를 수단으로 하여 방어를 강화해왔다. 기후는 겨울에 습하고 추우며, 여름은 덥고 습윤하다. 12~2월에 눈이 내리고, 봄에는 보통 비가 온다. 겨울 기온은 -1~10℃이고, 여름은 20~30℃이다. 포 강 유역이라 가끔 안개에 싸이지만 근처 남쪽의 논이 사라지면서 이러한 현상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밀집된 시가지가 지역의 공기순환을 막고 있다.
밀라노의 도시 구조는 역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난 1,000년 동안 도시의 중심은 지금 두오모 대성당의 남서쪽에 위치했으며 카롤링거 왕조 때 통합 구축된 불규칙한 외부의 방어선과 4개의 문을 통해 주변 교외와 연결되는 도로를 갖춘 직4각형의 도시였다. 이 중심지는 오늘날까지 도시 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왕조의 투쟁 시대와 알프스 횡단사업에 따라 도시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고, 1162년 도시가 파괴된 후 외곽으로 타원형의 확장이 있었다. 도시 내부에서 활동의 중심지인 스포르체스코 성은 15세기 왕조 투쟁의 산물이며 16세기 스페인인에 의해 강화되었다. 메르칸티 광장은 중세의 경제 중심지였고 두오모 대광장은 1489년에 대성당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성 및 대성당과 함께 밀라노 사람들의 활력소인 새로운 상업지구 코르두시오 광장은 현대 도시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다 조직적인 계획이 수립되었고, 새로운 지구들에는 전통의 방사상 도로에다 넓게 직교하는 우회도로를 건설했다. 신교외 지역의 중심지인 볼라테·노바테밀라네세·쿠사노밀라니노·키니셀로발사모·세스토산조반니, 심지어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몬차 등이 주요간선도로로 고대 도시의 핵심부에 연결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산업의 성장은 실제로 도시 외곽에 집중되어왔다. 특히 북부·북동부·남부·남서부 지역은 완전히 공업지구로 개발되었고, 교외의 세스토산조반니에는 중공업이 집중되어 있다. 도심은 주변부 개발에 상응하는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 좁은 도로와 광장이 교통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50년 이래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 중앙에는 많은 옛 도로와 건물들이 대단위의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로 무계획하게 대체되었다.
주민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북부로 왔다. 인구 압력으로 도시의 성장도 있었지만 빈민가와 브리안차 같은 판자촌의 증가를 가져왔다. 새롭게 활기에 찬 밀라노의 거대한 도시 확장은 특히 북동부의 크레셴차고, 남부의 로고레도·비젠티노 등 교외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경제
밀라노는 광범위한 도로·철도·통신망과 지리적 위치를 갖추고 있는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이다. 이곳의 부(富)와 높은 인구밀도는 다른 공업도시와는 달리 경제적 중요성과 잠재적인 팽창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계공업이 우세하며 자동차, 비행기, 모터사이클, 전기기구, 철도설비, 기타 금속제품의 생산이 거의 반을 차지한다.
섬유공업(면직물·대마섬유·견·합성섬유)은 밀라노 주 안에 있으나 도시 자체는 기성복과 디자이너 패션품이 우세하다. 밀라노의 패션은 상업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며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가게들이 있다. 화학제품·의약품·염료·비누·화공약품·인쇄·출판·음식·목재·종이·고무제품이 우수하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전자통신의 중심지로서 정보처리와 통신을 포함한 첨단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상업활동은 공업발달에 고무되었다.
밀라노에는 이탈리아 최대의 도매시장이 있으며 합성섬유·면직물·목제품·화학제품·기계류를 중심으로 한 수출 무역이 활발하다. 이러한 방대한 경제의 복합성은 이탈리아의 최대 증권시장과 은행의 효율성이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에서 중요한 무역 전시회의 하나인 국제견본무역박람회가 밀라노 주최로 매년 4월에 열린다. 생산·교역과 더불어 이곳의 교통은 국가적 핵심이며 국영철도는 치밀하게 설계되어 도시의 경관과 융화되고 있다.
알프스 횡단 터널 및 기타 주요 철도노선으로 유럽 각처와 연결되며 주요도시들과의 사이에 직행 기차편이 많이 있다. 또한 도로망이 모이는 밀라노는 수려한 경관지역을 지나는 남북종단고속도로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정치와 사회
이탈리아 정부는 중앙 행정부와 지방 행정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방 행정부는 특정지역에 대해 제한된 관할권을 갖는다. 밀라노 주의 최고 통치권자는 지사로 공공 행정활동을 감독한다.
주정부는 관할 구역내의 보건·위생·공공사업·복지·교육·농업·상업 등 주요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부지사·자문위원·행정부·지사가 뽑은 위원들로 구성된 주의회가 있다.
밀라노 콤무네(자치시)는 시의회와 시장이 다스린다. 시의회의 행정적인 선거에는 주에 등록된 모든 유권자가 참여하며 의회와 시장은 자치구의 단체장들이 선출한다. 시장은 콤무네 행정부의 우두머리이며 이탈리아 공화국 중앙 정부를 대표한다. 결혼예식 거행, 출생·사망 신고, 개개 시민활동의 안녕과 질서 유지가 시장의 책임에 속한다.
1970년대초에 제정된 법률에 의거하여 지방의 행정부와 의회는 광범한 자치권을 행사하며 중앙정부나 다른 지역의 이익에 침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반 사항에 대한 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 이곳의 중앙우체국은 하루 24시간 일한다. 도로·공중 위생과 잘 훈련된 인력으로 도시의 청결과 시민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몇몇 지역이 인구과밀과 빈약한 주거환경 때문에 어려움이 있으나 보건 관리시설은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며, 연구시설뿐만 아니라 공·사로 운영되는 이동 병원과 진료소를 갖고 있다.
문화
밀라노의 가장 뛰어난 기념물은 두오모 대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걸작이다.
이것은 현재 유럽에서 3번째 크기의 교회로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386년에 시작되어 5세기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한때 산타테클라와 산타마리아마조레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1651년 건축된 바로크풍의 팔라초 디 브레라 또한 유명하다. 이탈리아 최대 화랑의 하나인 브레라 미술관은 북이탈리아 회화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국립 브라이덴제 도서관과, 안토니오 카노바의 나폴레옹 입상이 압도하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가리발디 거리에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4세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산심플리치아노 교회가 있다. 이 교회 뒤에는 암브로조 베르고뇨네가 제작한 15세기 프레스코인 〈성처녀의 대관식 Coronation of the Virgin〉이 보관되어 있다. 그밖에도 중심지에는 산사티로·산에우스토르조·산로렌초마조레·산바빌라 등의 유명한 교회가 있다.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도 바가티발세키 궁을 포함하여 아름다운 궁들이 몇 개 있다. 르네상스 최고 걸작의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프레스코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은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도미니쿠스 수도원 식당에 있다. 카보우르 광장을 지나면 시민공원과 투라티 조류를 수집해놓은 시립자연과학박물관이 있다. 1609년에 세워진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시립도서관, 도나티 재단, 대학들, 롬바르도 인문·자연과학 학술원, 국가문서기록보존소 등에는 훌륭한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밀라노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로마 가톨릭계 대학의 하나인 사크로쿠오레가톨릭대학(1920)·국립델리스투디대학(1923)루이기보코니상과대학(1902)이 있다. 기타의 고등교육연구소로 원자력기술연구소, 엔리코페르미 핵연구소, 주세피베르디 음악원이 있다. 스칼라좌(座)는 1776~78년 신고전주의 건축의 선구자인 주세페 피에르마리니가 세운 것으로 세계 최대 극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외에도 리리카·오데온·스타빌레 극장이 있고 영화관도 여러 개 있다. 16세기에 건설되어 통신과 수운에 큰 역할을 했던 운하는 이 도시의 남쪽에 남아 있다. 여름에는 포르타 티치네세와 포 강 사이의 운하에 운행되는 관광선이 16~19세기에 건설된 밀라노 귀족들의 대농장을 지나게 된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스포츠를 이끌고 있다. 팔라초 델로 스포르트는 대표적인 레크리에이션 건물이다. 유럽 최고 경마장의 하나인 이포드로모 경마장, 미라벨로 경마장, 산시로에 있는 축구장 등 곳곳에 많은 운동시설물이 있다. 특히 현대적인 사이클 경기장인 비고렐리, 리나테 공항 근처의 인공호수인 이드로스칼로 호, 몬차 근처의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장이 유명하다.
역사
초기단계
BC 600년경 갈리아족이 처음으로 정착했고 뒤이어 수세기 동안 인수브레스족으로 알려진 켈트족의 수도였다.
BC 222년 당시에는 메디올라눔이란 지명으로 이미 남부 알프스의 로마인 지배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의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권력과 경제력이 신장되어 로마에 이어 서로마 제국의 제2도시가 되었다.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국이 이분되면서 밀라노를 황궁소재지와 행정중심지로 삼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곳을 '이탈리아의 대리자'로 선언했다.
452년 훈족 아틸라의 침략이 있었고, 539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당했다. 카롤링거 왕조 때(774년 샤를마뉴 지배하로 통합) 밀라노는 활기를 되찾았으며, 특히 안스페르토 다 비아소노 대주교의 노력으로 9세기말에 도시의 붕괴된 성벽이 재건되었다. 아리베르토 다 안티미아노(1018~45) 치하에서 대주교의 정치적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1,000년에 걸친 대주교의 지배는 위대한 밀라노의 근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대주교의 권위가 실추되고 주민의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 정치구조는 자치도시(코뮌)로 바뀌게 되었다.
롬바르디아 도시들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밀라노는 그 주변의 파비아·크레모나·코모·로디 같은 덜 번영한 곳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1111년 밀라노의 로디 침공과 1118~27년에 걸친 코모의 파괴가 있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사태개입에 나서 밀라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하에 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새로 수립된 롬바르디아 동맹의 후원으로 1167년 밀라노는 재건되어,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게르만 세력을 격퇴한 후 100년 이상 찬란한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12세기초 특히 모직물·병기 제조업자 길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계층이 꾸준히 영향력을 증대시켜온 반면, 교회의 재정적 특권은 약화되었다.
스와비아의 프리드리히 2세와 관계가 악화된 후 밀라노인들은 덜 봉건적인 도시 지배 세력의 하나인 파가노 델라 토레를 그들의 보호자로 공표했다. 그러나 도시는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황제에게 패했다(1237). 토리아니 가문과 또다른 세력인 비스콘티 가문과의 투쟁의 그늘에서 공국시대가 열렸다. 새로 인기를 얻은 토리아니 가문은 구엘프라는 이름을 얻었고, 귀족 정치로 이어진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을 이끌었다(구엘프와 기벨리). 1277년 밀라노의 대주교 오토네 비스콘티는 데시오 전투에서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1311년 그뒤를 계승한 사촌 마테오가 최고 영주로서 콤무네의 정치 형태를 대신하여 밀라노와 주변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산업과 상업은 더 많은 세력을 가진 경제동맹체를 탄생시키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1450년 밀라노는 야망에 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66)에게 다시금 점령당했고 그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와 견직물 산업의 도입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는데, 이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이기도 하다(이탈리아 전쟁). 그러나 1499년 밀라노 공국은 비스콘티 가문의 먼 후손이기도 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손에 넘어갔다.
1500년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침공했으나 패했고, 1513년 스위스의 도움을 받은 그의 아들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이곳을 정복했다. 루이 12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마리냐노(지금의 멜레냐노) 승리로 밀라노를 재정복했다. 1529년 평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밀라노는 다시금 스포르차 가문으로 넘어갔다.
근대도시의 전개
1535년 재직중인 공작의 급서로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카를 5세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1706년까지 지속된 스페인의 통치하에서 긴 경제적 침체기와 정치적 쇠퇴기가 있었다. 1630년 엄청난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었는데, 유명한 역사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1785~1873)는 그의 소설 〈약혼자 I promessi sposi〉에서 이 재앙을 생생히 묘사했다. 1706년 9월 오스트리아의 첫번째 통치자로 사보이공 외젠이 입성함으로써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전반은 무시와 압박으로 특징지워지나, 엑스라샤펠 조약(1748) 후 신임 통치자는 밀라노의 부유한 상업계층과 연합하여 계몽과 성장의 반세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특히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 있었으며, 뛰어난 범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체사레 베카리아와 문장가이면서 행정가인 피에트로 베리 같은 인물이 활동했다. 이들과 푸니 협회 회원들은 오스트리아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 군대가 1796년 5월 15일 밀라노에 입성할 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97년 키살피나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805년 밀라노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이 도시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이 붕괴되고, 다음해 빈 회의 이후로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을 거의 50년간 재집권했다.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새로운 흐름,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항한 시민 봉기가 1848년 3월에 5일간(18~22) 일어났다. 이 세력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때까지 남아 마침내 밀라노를 독립시켰다. 마젠타 전투(1859. 6. 4) 며칠 후 밀라노인들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와 나폴레옹 3세의 연합군이 개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19년 3월 23일 호전적인 우익 그룹의 형성과 함께 파시즘이 탄생했다.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집중 포격으로 심한 손실을 입었으나 열성적인 노력으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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