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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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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과 잡화점 점원이었던 베르디의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 베르디는 무식했으며 아들을 끝까지 교육시키기에는 너무나 가난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아들 베르디는 부세토의 부유한 상인이며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주목을 끌어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파트보를 베끼고 오르간 연주자를 대신하는 일 이외에 베르디는 지방의 음악단체와 교회를 위해 소품을 작곡했다. 18세가 되자 바레치가 비용을 부담해 밀라노로 가서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나이가 많아 거절당했다.

그러나 3년간 밀라노에 머물면서 라 스칼라 극장의 일원이었던 음악가 빈센초 라비냐에게 배웠다. 1834년 부세토로 돌아온 그는 바레치의 후원으로 공석인 음악감독직을 얻으려 했으나 각기 후보를 내세우려는 성직자들 때문에 파당적인 논쟁이 뒤따랐다. 이러한 경험으로 베르디는 성직권위주의에 반대하고 부세토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감독에 임명되었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836년 베르디는 후원자의 딸 마르게리타 바레치와 결혼했다.

오페라 〈산보니파초의 백작 오베르토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의 작곡을 계기로 1836년 다시 밀라노로 갔으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이 작품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극장을 위한 3편의 오페라를 위촉받았다. 그중 첫번째 작품인 〈하루살이 임금님 Un giorno di regno〉(1840 초연)은 오페라 부파(희극적 오페라)였는데 반응이 너무 나빠 1번의 공연으로 끝났다.

베르디는 당시 아내를 잃은 상태였고 그보다 1년 전에는 어린 아들을 잃었기에(부세토를 떠나기 전에 이미 한 아이를 잃었음) 실의에 빠져 있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오페라를 작곡할 수는 없었다. 라 스칼라 극장 감독은 계약에서 그를 풀어주었으나 베르디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생각되자 곧 네부카드레자르 2세의 이야기를 각색한 오페라 대본을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처음에 베르디는 이 대본을 마지못해 읽었으나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의 합창이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거부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작곡된 〈나부코 Nabucco〉(1842)로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확고해졌다.

나부코에 출연한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라 스칼라 극장의 경영진이 〈오베르토〉의 공연 결정을 하도록 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녀는 한동안 추문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베르디의 2번째 부인이 되었다. 한때 도니체티의 여주인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함께 노래했던 테너 나폴레오네 모리아니의 정부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1명은 1853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결점들 때문에 그녀는 베르디와의 결혼을 주저했고,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그녀를 모델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창녀' 비올레타로 그렸다. 그녀는 확실히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베르디는 분단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프랑스 시민이었던 그는(사실 그는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지역의 프랑스인 서기에게 조제프 포르튀냉 프랑수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음)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밀라노에서는 여권을 소지한 외국인이었다. 〈나부코〉의 합창은 그에게 이탈리아의 염원을 대변하고, 오스트리아의 검열에 대항하게 하는 애국심을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하는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이탈리아 민중들은 확실히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자신들의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를 그린 〈롬바르디아인 I Lombardi〉(1843),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각색한 〈에르나니 Ernani〉(1844), 〈두 사람의 포스카리 I due Foscari〉(1844), 〈잔 다르크 Giovanna d' Arco〉(1845) 등 그후 발표된 오페라들은 검열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극적 외관으로 내용을 감춤으로써 애국적 정서를 표현했다.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영도하에 이탈리아의 애국지사들이 통일 이탈리아의 독립을 성취하기까지 베르디(그의 이름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머리글자와 일치함)는 통일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고, 상당 기간 예술적으로는 답보상태에 있게 된다.

〈맥베스 Macbeth〉(1847)에서 베르디는 분명한 발전을 보여준다.

성서적인 주제에서 〈나부코〉의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었듯이, 이제 그는 셰익스피어 극의 비극적 주제에서 잠재해 있던 자신의 최고의 재능을 끌어냈다. 〈맥베스〉에는 진부하고 조잡한 면이 없지 않으나 강력한 힘이 있는 만큼 〈돈 카를로스〉·〈아이다〉·〈오텔로〉를 낳게 한 천재의 숨결이 숨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베르디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1846년 〈에르나니〉를 공연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했으며, 다음해 런던에서는 실러의 〈군도 Die Räuber〉를 각색한 오페라 〈도둑들 I masnadieri〉이 초연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은퇴 후 노래를 가르치고 있던 스트레포니와 우정을 새롭게 다졌다. 친밀한 관계는 계속 발전되었고 그들의 결혼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지만, 그 둘 중 아무도 결혼이라는 형식에 구애되려 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스트레포니는 자신이 베르디의 아내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캔들로 고통받은 베르디는 산타가타에 스트레포니를 데려다놓은 것 때문에 전처의 아버지 바레치에게 힐책을 받았다. 산타가타는 부세토 근교에 있으며, 부자가 되어 이곳의 땅을 구입한 베르디는 만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베르디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의 교육에 도움을 준 부세토 지방에 정확하게 돈으로 보답했지만 그뒤 그 지방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자 그곳의 음악활동에 깊이 관여하기를 거절했다. 산타가타에 머문 지 7년이 지난 1859년 그와 스트레포니는 사보이에 있는 외딴 마을로 가서 교회와 국가의 규범에 따라 그들의 결합을 합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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