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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5. 3. 7, 이탈리아 밀라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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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3. 5. 22, 밀라노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그의 소설 〈약혼자〉는 민족주의가 흥왕했던 리소르지멘토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에게 강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세계문학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1792년 부모가 이혼한 뒤 어린시절을 주로 교회 부속학교에서 보냈다. 원래 칼뱅주의자였으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에트 블롱델과 1808년 결혼해 자신도 2년 뒤에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밀라노와 고향 브루시글리오의 별장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1812~15년에는 성탄절·성금요일·부활절 등 교회 축제에 부치는 일련의 종교시 〈신성한 찬가〉(1815)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찬가를 썼다. 그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뛰어난 작품인 〈성신강림제〉는 1822년에 출판되었다. 걸작 〈약혼자〉(3권, 1825~27)는 밀라노 폭동, 30년전쟁, 페스트가 발생했던 17세기초의 롬바르디아를 무대로 한 소설로 악독한 그 지방 태수와 비겁한 교구사제들 때문에 쉽사리 결혼하지 못하는 두 농사꾼 연인의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의 소설 〈약혼자 I promessi sposi〉는 민족주의가 흥왕했던 리소르지멘토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에게 강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세계문학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1792년 부모가 이혼한 뒤 어린시절을 주로 교회 부속학교에서 보냈다.
1805년에는 어머니와 그녀의 애인을 따라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급진단체에 가입했으며 볼테르식 회의주의로 전향했다. 반(反)교권적 시 〈자유의 승리 Il trionfo della libertà〉는 그의 사고의 독립성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애인과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의 애인이 남긴 재산 덕분에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래 칼뱅주의자였으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에트 블롱델과 1808년 결혼해 자신도 2년 뒤에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밀라노와 고향 브루시글리오의 별장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1812~15년에는 성탄절·성(聖)금요일·부활절 등 교회 축제에 부치는 일련의 종교시 〈신성한 찬가 Inni sacri〉(1815)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찬가를 썼다. 그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뛰어난 작품인 〈성신강림제 La pentecoste〉는 1822년에 출판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학술논문 〈가톨릭 윤리에 대한 고찰 Osservazioni sulla morale cattolica〉(1819)과 1821년의 피에몽 혁명에 부치는 송시(頌詩) 〈1821년 3월 Marzo 1821〉,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비극 〈카르마뇰라 백작 Il conte di Carmagnola〉(1820)·〈아델키 Adelchi〉(1822 상연) 등을 썼는데, 〈카르마뇰라 백작〉은 15세기의 베네치아와 밀라노 사이의 갈등을 그린 낭만적인 작품이고, 〈아델키〉는 샤를마뉴가 롬바르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정복한 이야기를 그린 재미있는 시극(詩劇)이다.
그밖의 송시로는 1821년 나폴레옹의 죽음에 부친 〈5개의 오월 Il cinque maggio〉(1822)이 있는데, 이 작품을 처음 독일어로 번역한 괴테는 나폴레옹의 죽음을 기려 쓴 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평했다.
걸작 〈약혼자〉(3권, 1825~27)는 밀라노 폭동, 30년전쟁, 페스트가 발생했던 17세기초의 롬바르디아를 무대로 한 소설로 악독한 그 지방 태수와 비겁한 교구사제들 때문에 쉽사리 결혼하지 못하는 두 농사꾼 연인의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결국 한 용감한 수도사가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무사히 결혼하도록 도와준다. 세상의 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내와 궁극적인 안식과 인간성에 대한 희망으로 종교를 수용하는 작가의 태도는 이 소설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며, 경쾌한 해학은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는 이 작품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이탈리아와 각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한정된 지식계층보다 폭넓은 독자층에 수용될 수 있는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애국심에서 그는 소설을 당시 피렌체 지방의 실제 언어에 가깝게 쓰려고 했다. 〈약혼자〉의 마지막 판(1840~42)은 낡은 수사적 형식을 모두 걸러내어 명확하고 표현력 넘치는 산문으로 썼는데, 작가가 목표했던 대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산문은 후대의 많은 이탈리아 작가들을 위한 본보기가 되었다.
1833년 첫번째 아내가 죽었고, 2번째 아내와 자녀들도 대부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이러한 불행 때문에 신앙을 잃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1860년 이탈리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873년 큰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그해 죽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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