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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15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역사를 주도한 밀라노의 유력 가문.
하급 귀족으로 출발한 이 가문은 11세기초 밀라노 자작이라는 세습지위를 얻은 듯하며 이에 따라 가문의 이름을 비스콘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가문은 교황 우르바누스 4세를 통해 밀라노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다. 우르바누스 4세는 당시 밀라노의 지배가문이었던 델라 토레가(家)를 견제하기 위해 1262년 오토네 비스콘티(1207~95)를 밀라노 대주교에 임명했다. 비스콘티는 1277년 데시오 전투에서 델라 토레 가문을 무찌르고 밀라노 대주교가 지니고 있던 종래의 세속권력을 차지했다.
그후 점진적으로 권력을 종손(從孫)인 마테오 1세에게 이양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리직과 밀라노의 영주 칭호를 획득한 비스콘티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그결과 교황 요한네스 22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요한네스 22세는 밀라노에 대해 성무(聖務)금지령을 내렸으며, 비스콘티 가문에 대항한 십자군을 일으키기도 했다.
1322년 마테오 1세가 아들 갈레아초 1세(1277경~1328)에게 권력을 넘겨준 후 가문은 영토확장을 계속하는 한편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집권층을 비롯해 프랑스·독일·사보이의 군주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갈레아초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초(1302~39)가 권력을 계승한 후 1329년 교황과 화친이 이루어졌다. 후계자가 없이 아초가 죽자 잠시 위기가 찾아왔으나 마테오 1세의 아들이며 아초의 삼촌인 루키노(1292~1349)와 조반니(1290~1354)가 공동 군주로 선출됨으로써 위기가 극복되었다. 이 두 사람의 지배 아래 가문은 교황과의 싸움으로 상실한 영토를 되찾고 지배영토를 더욱 확장시켰다. 1349년 루키노가 죽은 후 영주직은 세습되었으며 1342년에 이미 밀라노 대주교가 된 조반니가 밀라노 군주의 자리를 계속 유지했다.
1350년대에는 볼로냐와 제노바를 잠시 합병함으로써 영토가 더욱 넓어졌다. 조반니가 죽고 나서 비스콘티 가문의 영토는 조반니의 세 조카가 공유했다. 그 가운데 마테오 2세(1319경~55)가 죽자 베르나보(1323~85)와 갈레아초 2세(1321경~78)가 밀라노와 그에 속한 영토들을 분할하여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을 각각 맡아 통치했다.
파비아(밀라노 남쪽)에 자리를 잡은 갈레아초 2세는 페트라르카와 같은 시인·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파비아대학을 설립했다. 서로가 독립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했지만 이들 두 형제는 공동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자신들의 영토적 이해관계로 인해 주로 피렌체와 교황을 상대로 한 전쟁을 비롯해서 이탈리아 내의 모든 전쟁에 휘말려들었고 서로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1378년 갈레아초 2세가 죽은 후 베르나보는 프랑스 앙주의 루이 공(公)과 군사동맹을 체결했으며 자신의 딸 루차를 루이의 아들과 혼인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베르나보는 1385년 갈레아초 2세의 아들 잔 갈레아초에 의해 체포되어 몇 개월 후 감옥에서 죽었다. 잔 갈레아초의 통치기에 비스콘티 가문은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1402년 그가 숨질 당시 가문은 밀라노 공작 및 파비아 백작작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비스콘티). 그의 뒤를 이은 장남 조반니 마리아(1388~1412)의 시대는 파국적이었다.
조반니 마리아는 아버지가 정복했던 영토들을 상실했으며 롬바르디아의 많은 도시들은 다시 각 지역의 영주들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무능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하며 정신이상자로 묘사된 조반니 마리아는 1412년 음모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조반니 마리아에 이어 공작령을 계승한 그의 동생 필리포 마리아(1392~1447)는 용병대장 파치노 카네의 미망인과 결혼함으로써 카네의 병사들과 영토를 손에 넣는 등 점차로 가문의 세력을 재건했다.
필리포 마리아는 병약한 체질로 인해 신경질적이고 사람을 멀리했지만 성공적으로 이탈리아를 다스렸다. 밀라노에서 그는 정부재정체제를 재편하고 견직산업을 도입했다. 1447년 베네치아 군대가 밀라노를 침공하자 그는 사위인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포르차는 그의 유일한 딸인 비앙카 마리아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필리포 마리아가 갑자기 죽자 공작령을 놓고 스포르차와 아라곤의 왕 알폰소 5세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알폰소 5세는 필리포 마리아에 의해 상속자로 지명된 인물이었다. 결국 스포르차가 승리를 거두고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를 자신의 가문 이름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정부제도는 18세기에도 존속했으나 가문의 이름은 비앙카 마리아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가문의 혈통은 모계를 통해 유럽의 유력한 왕가들, 즉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와 오스트리아·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 영국의 튜더 왕가 등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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