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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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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단계

BC 600년경 갈리아족이 처음으로 정착했고 뒤이어 수세기 동안 인수브레스족으로 알려진 켈트족의 수도였다.

BC 222년 당시에는 메디올라눔이란 지명으로 이미 남부 알프스의 로마인 지배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의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권력과 경제력이 신장되어 로마에 이어 서로마 제국의 제2도시가 되었다.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국이 이분되면서 밀라노를 황궁소재지와 행정중심지로 삼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곳을 '이탈리아의 대리자'로 선언했다.

452년 훈족 아틸라의 침략이 있었고, 539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당했다. 카롤링거 왕조 때(774년 샤를마뉴 지배하로 통합) 밀라노는 활기를 되찾았으며, 특히 안스페르토 다 비아소노 대주교의 노력으로 9세기말에 도시의 붕괴된 성벽이 재건되었다. 아리베르토 다 안티미아노(1018~45) 치하에서 대주교의 정치적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1,000년에 걸친 대주교의 지배는 위대한 밀라노의 근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대주교의 권위가 실추되고 주민의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 정치구조는 자치도시(코뮌)로 바뀌게 되었다.

롬바르디아 도시들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밀라노는 그 주변의 파비아·크레모나·코모·로디 같은 덜 번영한 곳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1111년 밀라노의 로디 침공과 1118~27년에 걸친 코모의 파괴가 있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사태개입에 나서 밀라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하에 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새로 수립된 롬바르디아 동맹의 후원으로 1167년 밀라노는 재건되어,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게르만 세력을 격퇴한 후 100년 이상 찬란한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12세기초 특히 모직물·병기 제조업자 길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계층이 꾸준히 영향력을 증대시켜온 반면, 교회의 재정적 특권은 약화되었다.

스와비아의 프리드리히 2세와 관계가 악화된 후 밀라노인들은 덜 봉건적인 도시 지배 세력의 하나인 파가노 델라 토레를 그들의 보호자로 공표했다. 그러나 도시는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황제에게 패했다(1237). 토리아니 가문과 또다른 세력인 비스콘티 가문과의 투쟁의 그늘에서 공국시대가 열렸다. 새로 인기를 얻은 토리아니 가문은 구엘프라는 이름을 얻었고, 귀족 정치로 이어진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을 이끌었다(구엘프와 기벨리). 1277년 밀라노의 대주교 오토네 비스콘티는 데시오 전투에서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1311년 그뒤를 계승한 사촌 마테오가 최고 영주로서 콤무네의 정치 형태를 대신하여 밀라노와 주변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산업과 상업은 더 많은 세력을 가진 경제동맹체를 탄생시키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1450년 밀라노는 야망에 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66)에게 다시금 점령당했고 그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와 견직물 산업의 도입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는데, 이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이기도 하다(이탈리아 전쟁). 그러나 1499년 밀라노 공국은 비스콘티 가문의 먼 후손이기도 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손에 넘어갔다.

1500년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침공했으나 패했고, 1513년 스위스의 도움을 받은 그의 아들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이곳을 정복했다. 루이 12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마리냐노(지금의 멜레냐노) 승리로 밀라노를 재정복했다. 1529년 평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밀라노는 다시금 스포르차 가문으로 넘어갔다.

근대도시의 전개

1535년 재직중인 공작의 급서로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카를 5세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1706년까지 지속된 스페인의 통치하에서 긴 경제적 침체기와 정치적 쇠퇴기가 있었다. 1630년 엄청난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었는데, 유명한 역사소설가 알레산드로 만초니(1785~1873)는 그의 소설 〈약혼자 I promessi sposi〉에서 이 재앙을 생생히 묘사했다. 1706년 9월 오스트리아의 첫번째 통치자로 사보이공 외젠이 입성함으로써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전반은 무시와 압박으로 특징지워지나, 엑스라샤펠 조약(1748) 후 신임 통치자는 밀라노의 부유한 상업계층과 연합하여 계몽과 성장의 반세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특히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 있었으며, 뛰어난 범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체사레 베카리아와 문장가이면서 행정가인 피에트로 베리 같은 인물이 활동했다. 이들과 푸니 협회 회원들은 오스트리아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 군대가 1796년 5월 15일 밀라노에 입성할 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97년 키살피나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805년 밀라노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이 도시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이 붕괴되고, 다음해 빈 회의 이후로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을 거의 50년간 재집권했다.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새로운 흐름,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항한 시민 봉기가 1848년 3월에 5일간(18~22) 일어났다. 이 세력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때까지 남아 마침내 밀라노를 독립시켰다. 마젠타 전투(1859. 6. 4) 며칠 후 밀라노인들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와 나폴레옹 3세의 연합군이 개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19년 3월 23일 호전적인 우익 그룹의 형성과 함께 파시즘이 탄생했다.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집중 포격으로 심한 손실을 입었으나 열성적인 노력으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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