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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는 1158년에 제국의 권리를 완전히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제2차 원정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맞서려고 했던 밀라노를 포위 공격해 정복한 뒤 론칼리아 의회를 열었다. 이 의회의 목적은 황제의 권리를 명시하고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의 결정에 따르면 신성 로마 제국은 해마다 3만 파운드 가량의 은을 얻게 될 예정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158년부터 이 권리를 인정받고 체계적인 재무행정을 시행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1162년부터는 이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의 목적은 이탈리아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잘 통제된 성과 궁전 및 도시들로 조직화하고, 도시에는 제국 관리들이 지배하는 자치정부를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이를 그들의 자유를 축소하는 조치로 생각했다. '포드룸'이라는 세금이 이탈리아의 신성 로마 제국 영토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부과된 대신, 이탈리아 귀족과 자치단체는 프리드리히의 군대에서 복무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고 그의 보호를 보장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들어오는 돈의 일부는 독일 군주들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독일 군주들에게 정치적으로 많이 양보하지 않고도 독일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 가운데 성직자들은 여전히 이탈리아에 철저히 봉사해야 했다. 마인츠 대주교 관구는 크리스티안 대주교가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사절로 활동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탈리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프리드리히는 용병(브라반티니)을 모집하여, 봉토 소유자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군사적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거두어들이는 돈이 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 정책을 좌우하는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도시뿐만 아니라 교황도 이탈리아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탄탄하게 조직되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1159년 옥타비아누스 추기경은 프리드리히의 지지를 얻어 교황 빅토르 4세로 선출되었고, 롤란드 추기경은 많은 소란과 논쟁이 벌어진 선출 회의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선출되었다.
많은 추기경의 지지를 얻은 알렉산데르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시칠리아의 굴리엘모한테서 진짜 교황으로 인정을 받았다. 116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소집한 파비아 종교회의에는 빅토르 4세만 참석하여 정식 교황으로 선언되었고, 알렉산데르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교회의 가장 훌륭한 법률가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데르 3세는 황제한테서 독립된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1160년에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헝가리·롬바르디아,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황제까지도 알렉산데르 쪽에 가담했다. 알렉산데르는 1161년에 프랑스로 가서 1165년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당시 솔즈베리의 요한네스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독일인을 국가들의 재판관으로 임명했는가?" 프리드리히는 손 강 연안의 생장드로슨에서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만났을 때,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줄 것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데르는 프리드리히를 다시 교회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썼지만, 이 노력도 성공하지 못했다. 알렉산데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황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교황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162년에 프리드리히는 밀라노를 파괴했다.
1164년 빅토르 4세가 죽자, 다셀의 라이날트는 황제의 뜻을 어기고 새 교황 선출을 서둘러 파스칼리스 3세(1164~68 재위)를 새로운 황제파 교황으로 선출했다.
루이 7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알력 관계에 있었고 헨리 2세가 토머스 베케트와의 논쟁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헨리 2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했다. 1165년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166년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1세가 죽은 뒤, 프리드리히는 로마로 돌아간 알렉산데르 3세와 시칠리아에 결정타를 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제4차 이탈리아 원정을 막기 위해 롬바르디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원정은 군대 내부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하여 재난으로 끝났다. 다셀의 라이날트도 이때 로마에서 죽었기 때문에 황제는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가 루이 7세와 헨리 2세 사이의 화해를 주선한 다음, 1170년에 밤베르크 주교를 알렉산데르 3세에게 보내고 비잔틴 제국에도 사절을 보내자, 알렉산데르조차도 피할 수 없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제5차 이탈리아 원정(1174)에서 롬바르디아 동맹을 군사적으로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롬바르디아 동맹은 몬테벨로 휴전 협정에서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지원하러 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레냐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동맹에게 패배했다.
그는 교황과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1176년에 그들은 아나니 조약을 맺었다. 베네치아 평화조약(1177)에서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 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인정했다. 프리드리히는 산마르코 교회 앞에서 교황으로부터 평화의 입맞춤을 받았다. 베네치아에서 황제의 대표단은 황제의 입장을 개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롬바르디아 동맹과 황제 사이에 휴전 협정은 맺어졌지만 강화 조약에는 롬바르디아 동맹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롬바르디아 동맹과 황제는 1183년 마침내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제국 안에서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작센의 사자공 하인리히가 프리드리히 다음으로 강력한 군주였다. 프리드리히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자,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의 변경백 하인리히 2세 야조미르고트의 영지인 바이에른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에게 바이에른을 주었고, 변경백의 영지인 바이에른을 특권을 가진 공작령으로 끌어올렸다. 황제는 또한 하인리히가 작센 공작령과 메클렌부르크를 계속 지배하게 했고, 1154년에 하인리히는 엘베 강 동쪽의 식민지에서 주교들을 임명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1158년은 신성 로마 제국에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프리드리히는 제국령 플라이스너란트(라이프치히 남쪽)를 세웠고,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를 왕의 지위로 끌어올렸으며, 브레멘 대주교에게 중요한 특권을 주어 대주교가 빼앗긴 정치적 권한을 되돌려주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에게 영지를 주겠다고, 즉 발데마르를 일정한 권한을 가진 봉신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하인리히 공작은 뮌헨과 뤼베크라는 도시를 세웠다(1158). 뤼베크가 건설되자 독일 상인들은 발트 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인리히 공작은 독일인과 고틀란드 주민들 사이의 계약을 체결해주었고,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에 사절을 보냈으며, 1189년에는 노브고로트와 무역 협정을 맺었다.
1180년경에 독일 상인들은 발트 해 연안의 리가에 도착했다. 하인리히가 1177년에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한 것이 그들의 진출을 보호해주었다. 1148년에 이미 하인리히는 엘베 강 연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슈타데를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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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리드리히 1세의 중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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