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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세 이탈리아 정계에서 서로 대립했던 두 정파.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파와 독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파 사이의 불화 때문에 이탈리아의 도시 안에서 대대로 투쟁이 벌어졌다.
구엘프라는 말은 12~13세기초 황제위를 놓고 경쟁을 벌인 독일의 '벨프' 가문에서 나왔으며, 기벨린은 벨프가의 반대세력인 호엔슈타우펜가가 살던 성 이름 바이블링겐(Waiblingen)에서 나왔다. 이 이름들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까지 붙여졌다.
신성 로마 황제들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려 함에 따라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1155~90) 때부터 이탈리아는 황제 편에 가담해 권력과 특권을 강화하려는 사람들과 황제의 간섭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교황을 포함)로 갈라졌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1220~50)가 교황들과 싸움을 벌이는 동안 이탈리아의 양대 진영은 각각 구엘프와 기벨린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되었고(피렌체에서 처음 시작됨), 이로 인해 이탈리아 각 도시들 내의 반목뿐 아니라 도시들 사이의 반목도 한층 더 치열해졌다. 예전부터 있었던 도시의 정파들(대부분 귀족들로 이루어짐)은 대부분 교황 또는 황제를 각각 지지하며 서로 대립했고, 이들은 장소를 더 넓은 국제 무대로 옮겨 싸움을 벌였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의 특성은 잃지 않았다.
13세기 동안 내내 구엘프와 기벨린은 코무네(자치시)의 행정권을 놓고 서로 끊임없이 싸웠는데 이러한 싸움은 대개 패배한 쪽이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구엘프와 기벨린의 갈등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사이의 경쟁에도 나타났다.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여러 도시들이 교황·황제로 편을 가르게 되면서 서로 반목이 더 심해졌다.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초기에는 구엘프가 지배하는 피렌체와 그 동맹 도시들, 즉 몬테풀키아노·볼로냐·오르비에토와 기벨린을 지지하는 피사·시에나·피스토이아·아레초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호엔슈타우펜가가 남부 이탈리아를 잃고(1266) 그 혈통이 끊어짐에 따라(1268) 구엘프와 기벨린의 갈등은 의미가 달라졌다. 국제적인 영역에서 구엘프는 앙주 가문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 동맹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앙주 가문 출신의 군주를 비롯해 교황, 피렌체·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동맹도시들이 들어 있었다. 구엘프는 승리를 거둔 여러 도시에서 보수세력이자 재산가 집단으로 자리잡았고,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한 기벨린 사람들을 계속 추방상태에 묶어두려 했다.
기벨린은 제국에 대한 향수(이탈리아에서는 1268년부터 제국의 개념이 약해지고 있었음)로 결합해 있었는데, 이들의 제국사상은 1310~13년 황제 하인리히 7세와 1327~30년 루트비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 때 잠깐 동안 되살아나기도 했다. 14세기가 지나가면서 양 정파의 중요성은 급속히 쇠퇴했다. 신성 로마 황제들이 더이상 이탈리아에 관여하지 않았고 교황도 로마에서 프랑스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이들은 국제적으로 별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구엘프와 기벨린은 단지 지역정파를 의미했다. 이 용어들은 19세기에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시 나타났다. 신(新)구엘프는 교황을 설득해 이탈리아 도시국가 연방을 만들려 했던 반면, 반대파인 신(新)기벨린은 교황을 이탈리아 통일의 장애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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