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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 슈퍼
리치

야마우치 히로시

山内溥

재미'를 팔아 막대한 '재미'를 누리다

요약 테이블
출생 1927년

비디오게임의 대명사 닌텐도가 부진의 늪에 빠졌다. 120여 년 역사를 거치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왔지만, 상장 50년 만의 첫 적자는 큰 충격이었다. 닌텐도는 2011년(2011년 4월~2012년 3월) 432억 엔의 순손실을 내며, 1962년 상장한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불과 3년 전에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극찬을 받던 회사였다.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DS와 가정용 콘솔게임기 닌텐도 Wii가 굉장한 인기를 끈 덕분에 닌텐도는 2008년 사상 최대 실적(매출 1조 8,386억 엔, 영업이익 5,552억 엔)을 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는 왜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부러워했다.

닌텐도의 추락에 가장 뼈저리게 아파할 사람은 창업 3세 야마우치 히로시(山内溥, 1927년~ ) 최고상담역이다. 야마우치는 2002년 은퇴하기까지 반세기동안 경영 최일선에서 활약하며 닌텐도를 현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닌텐도 지분 10%를 갖고 있는 대주주인 만큼, 닌텐도의 시장가치에 따라 그의 재산도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다. 야마우치가 보유한 재산은 2008년 64억 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스마트 시대를 거스른 닌텐도의 주가가 2008년 7만 엔대에서 2012년 초 1만 엔대로 추락함에 따라 2011년 46억 달러, 2012년 초 25억 달러로 재산이 급감했다.

화투 제조회사 닌텐도

닌텐도는 화투에 뿌리를 둔 100년 기업이다. 야마우치의 외증조부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內房治郞, 1859~1940년)는 1889년 교토에 수제 화투 제조회사 닌텐도곳파이(任天堂骨牌)를 설립했다.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닌텐도배(杯)' 화투대회를 주최할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1963년 카드를 뜻하는 '곳파이(骨牌)'를 떼내고 '닌텐도'로 사명을 바꾸기 전까지, 회사는 일본 최초로 트럼프를 생산하는 등 카드 제조에만 한 우물을 팠다.

닌텐도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게임 회사의 모습으로 바꾼 사람은 야마우치 히로시였다. 1949년 스물두 살의 야마우치는 2대 사장인 외할아버지 야마우치 세키료(山內積良)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대학(와세다대학 법학 전공)을 중퇴하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젊고 경험은 부족했으나 경영은 야무졌다. 월트디즈니의 라이선스를 받아 만든 디즈니만화 캐릭터 트럼프는 한 해 60만 개가 팔릴 정도로 히트를 쳤다.

하지만 야마우치는 카드만으로는 회사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1958년 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당시 세계 최대 카드제조사 플레잉카드를 방문했다. 그런데 세계 1위임에도 열악하기 그지없는 플레잉카드의 규모를 보고 나니, 카드 업계에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닌텐도가 120년 역사에서 유일한 외도를 감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1960년대 야마우치 휘하의 닌텐도는 택시, 러브호텔, 즉석쌀밥 등의 신사업에 진출하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하지만 돈을 잃은 대신 얻은 수확은 값졌다. 야마우치는 닌텐도의 본업이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이라고 생각하고, 이후로는 본업에만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02년 닌텐도 협력업체 HAL연구소에서 영입한 이와타 사토루(岩田聡) 사장에게 CEO 자리를 내놓고 회장으로 물러나면서도, "다른 업종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게임 하나로 도요타를 제치다

야마우치가 차세대 사업으로 선택한 것은 완구다. 카드 사업을 하며 구축한 유통망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1966년 '울트라핸드'로 완구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울트라핸드는 도시샤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공장 설비기사로 근무하던 요코이 군페이(橫井軍平, 1941~1997년)가 심심풀이로 만들어 놀던 장난감이었다. 우연히 야마우치의 눈에 띄어 상품화된 울트라핸드는 카피본이 돌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고, 닌텐도는 도산 위기에서 기사회생했다.

요코이를 발굴한 것은 야마우치와 닌텐도에 큰 행운이었다. 닌텐도가 완구회사를 거쳐 세계적 게임회사로 변모하는 데 일등공신을 한 사람이 바로 요코이다. 울트라 시리즈와 레이저광선총을 개발해 1970년대 일본 완구 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 이어, 1980년 액정디스플레이를 사용한 '게임&워치'를 개발함으로써 게임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게임&워치는 요코이가 퇴근길 신칸센 열차에서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노는 샐러리맨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 제품은 닌텐도 게임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혁신성'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게임&워치는 첨단 기술로 승부한 제품이 아니다. 당시 전자계산기 경쟁의 결과로 과잉 생산된 액정에다 십(十)자 키 조종버튼을 부착했을 뿐이었다.

이후 "게임은 재미가 있어야지 하이테크놀로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널리 사용되어 장단점이 파악된 기술을 새로운 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히트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요코이의 사고방식은 닌텐도의 개발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닌텐도는 최초로 게임소프트웨어를 교환하는 방식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패밀리컴퓨터(패미컴, 1983년)',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1989년)' 등을 잇달아 성공시킨다.

1983년 발매된 패미컴은 닌텐도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며, 일본을 비디오 게임 산업의 중심에 올려놓는 데 크게 기여한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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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닌텐도는 하드웨어로 큰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하드웨어를 보급하고 돈은 소프트웨어로 번다는 전략이었다. 1985년 발표한 게임소프트웨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게임 시장에 전무후무한 초대형 히트작으로 기록되었다. 패미컴용부터 DS, Wii 전용까지 출시된 슈퍼마리오 시리즈는 30년 가까이 많은 인기를 누리며 2억 6,000만 장의 누적 판매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닌텐도도 게임 시장의 유일무이한 강호는 될 수 없었다. 1994년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려한 그래픽으로 시장을 공략하자,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플레이스테이션(소니)과 Xbox(MS) 등의 라이벌에 밀려 한물간 줄 알았던 닌텐도는 DS(2004년)와 Wii(2006년)로 다시 한 번 저력을 과시했다. 전 세계에서 판매된 DS 게임기가 1억 5,000여 만 개, Wii는 9,500만 개에 이른다. 한 때 닌텐도의 사원 1인당 매출액은 도요타자동차의 다섯 배, 1인당 순이익은 여덟 배에 달했다. 이때가 닌텐도의 최고 전성기였다.

애플 아이폰 열풍으로 가속이 붙은 스마트 시대의 도래에 닌텐도는 굴복했다. 스마트폰에 게임 유저들을 빼앗기면서도, 스마트기기의 위력을 무시한 오만에 스스로 발등을 찧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닌텐도 경영실적

2008년 정점을 찍은 닌텐도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계속 하락세에 있다. 스마트폰 게임 시장을 등한시하고, 온라인 게임과의 경쟁에서 뒤처진 것이 적자 원인으로 분석된다. - 자료 : 닌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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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적이고 괴팍한 제왕적 경영자

닌텐도의 성장과 더불어 야마우치의 제왕적 경영 스타일도 악명이 높아졌다. 야마우치에게는 '원맨 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닌텐도를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슈퍼마리오', '젤다의 전설'의 아버지로서 '게임 업계의 스티븐 스필버그'로 추앙받는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 닌텐도 정보개발본부장조차 "야마우치 사장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기 위해 모두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독선적이고 괴팍했다. 외할아버지의 급작스런 타계로 회사를 맡게 되자, 야마우치 일가 중에서는 오직 자신만이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가업을 계승했다. 실제로도 외할아버지가 타계하자마자 사촌형을 해고해 버렸다. 그는 직원들에게도 상당히 가혹한 CEO였다. 나이 어리고 경력이 일천한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자,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장기근속 직원들을 해고하기도 했다.

가족들에게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년시절도 평탄치는 않았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없던 야마우치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와 가문을 이어야 했지만, 야마우치가 다섯 살 때 가족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야마우치는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외할아버지에게는 반항적인 손자였고, 자식들(삼남매)에게는 일밖에 모르는 무서운 아버지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아들딸들은 회사일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마우치의 카리스마형 리더십과 직관이 없었다면 닌텐도가 교토의 향토기업에서 지금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회사에서 게임 출시를 결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 체계적 분석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더 신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우치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저렴하고, 조작이 간편하며, 기존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감'이었다. 슈퍼마리오도 출시 당시 액션(격투), 스피드(자동차경주) 일색의 게임 트렌드와 동떨어져 있어서 누구도 성공을 예상치 못했으나, 야마우치만은 달랐다. 그는 평생 한번도 비디오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잘 팔릴 게임을 골라내는 본능적 감각은 누구보다 뛰어났던 셈이다.

완벽주의적 근성도 게임개발자들을 괴롭혔다. 닌텐도는 2008년 Wii 전용 바둑소프트웨어를 발매할 때까지 바둑게임을 내놓지 못했다. 그 이유가 아마 6단의 바둑실력을 가진 야마우치가 "게임의 CPU가 나와 겨뤄서 이길 때까지 바둑게임을 출시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암묵적인 규칙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게임회사 CEO로서 그의 장점은 뛰어난 게임엔지니어를 발굴하고 그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닌텐도 게임 신화를 창조한 요코이 군페이, 미야모토 시게루 같은 게임장인이 닌텐도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뛰어난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사람은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이고, 닌텐도는 비디오게임 예술가들의 천국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야마우치 히로시의 슈퍼 리치 DNA! 집념

교토의 허름한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시작한 회사가 세계 게임 시장을 제패하기까지 닌텐도는 오로지 게임 엔터테인먼트 하나에만 매달렸다. 1990년대 후반 화려한 그래픽과 고성능 하드웨어로 무장한 경쟁사의 게임기에 고전할 때도, 야마우치는 트렌드를 따르기보다는 "게임은 재미가 가장 중요하고 그래픽은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개발전략을 고수했다. 변덕스러운 소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닌텐도에 환호했다. 트렌드를 좇기보다 한 우물을 파는 집념어린 일관된 전략을 추구하는 것, 야마우치의 성공 DN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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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집필자 소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서 10년 넘게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중 7년을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증권사를 비롯한 시중은행 등 금융업계를 출입하면서 보냈다. IT와 미디어 분야에도 ..펼쳐보기

문향란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국제부·경제부·산업부를 거치며 국내외 다양한 슈퍼 리치의 삶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보라 집필자 소개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경제부를 거쳐 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담당하고 있다.

출처

세계 슈퍼 리치
세계 슈퍼 리치 | 저자최진주 외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부자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0.00001%의 슈퍼 리치 40인의 삶과 성공 전략을 추적한다. 추진력, 배짱, 치밀함, 강박 등 40인의 슈퍼 리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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