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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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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번호판(다이얼)을 연거푸 돌려서 전화를 걸던 시대에 숫자가 적힌 버튼만 누르면 되는 버튼식 전화기의 등장은 생활 속 작은 '혁명'이었다. 무선 전화기나 자동응답기, 팩스의 등장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얼 전화기밖에 없던 1980년대 인도에 이 '신(新)문물'을 처음 들여와 히트를 시킨 곳은 탄탄한 유통망과 자금력을 갖춘 대기업이 아니었다. 어떤 눈 밝은 최고경영자가 형제들과 함께 운영하던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이 경영자는 이후 인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이동통신사를 키워낸다. 그가 바로 바르티 에어텔(Bharti Airtel)의 수닐 미탈(Sunil Bharti Mittal, 1957년~ ) 회장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012년 현재 81억 달러로 인도에서 다섯 번째, 세계 113위 갑부다.
자전거 부품상에서 최대 이동통신사 회장으로
미탈은 인도 북부 펀자브의 루디아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지역 국회의원이었다. 1976년 펀자브대학을 졸업한 그는 아버지에게 2만 루피(약 50만 원)를 빌려 고향에서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공장은 잘 되었지만, 그는 더 큰 성공을 위해 공장을 팔고 1980년 형제들과 뭄바이로 갔다.
미탈은 형 라케시, 동생 라잔과 함께 무역회사(Bharti Overseas Trading Company)를 설립해서 일본 스즈키 모터스에서 휴대용 발전기를 수입해 독점 판매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전기가 부족해 정전이 잦았던 인도에 발전기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기쁨도 잠시, 인도 정부는 1983년 발전기 수입을 금지하고 대기업 두 곳에만 발전기 제조 허가권을 줬다. 미탈은 "정부의 수입 금지 때문에 나는 하루 아침에 사업에서 쫓겨났다. 내가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멈춰서고 말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미탈은 대만에 갔다가 우연히 또 다른 기회를 발견한다. 인도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버튼식 전화기가 대만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그 때까지 전화 거는 속도가 느리고 재다이얼 기능도 없는 다이얼 전화기만 사용하고 있었다.
사업성을 알아본 미탈은 1984년부터 버튼식 전화기 부품을 수입한 후 조립해서 '미탈 형제들'을 뜻하는 '밋브로(Mitbrau)'라는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다. 전화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이후 독일의 지멘스와 기술 협력을 통해 인도 회사로는 처음으로 팩스와 무선 전화기 등을 만들었다. 회사는 빠르게 커갔다.
더 큰 기회가 찾아온 건 1990년대 초 인도가 시장을 개방했을 때다. 정부는 정보통신 시장도 개방해 휴대폰 서비스 업체를 공개 입찰했다. 미탈은 프랑스의 정보통신 업체 비방디(Vivendi)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델리 지역의 사업권을 따냈다. 사업권을 얻는 조건 중 '정보통신 사업을 해본 경험'이 포함되어 있어 일단은 비방디와 손을 잡았다.
1995년 미탈은 드디어 델리에서 에어텔이라는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라이선스 비용을 내지 못해 도산하는 다른 업체들의 사업권을 사들이며 인도 주요 도시로 서비스를 넓혀갔다. 그리고 몇 년 만에 가입자 200만 명을 돌파하며 업계 1위 자리를 굳혔다.
미탈의 승부수는 바로 '속도'
하지만 2000년대 초 미탈은 최대 복병을 만났다. 인도의 최대 재벌 그룹인 타타와 릴라이언스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으로 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정부는 CDMA 사업자의 라이선스 비용을 낮춰줬고, GSM(유럽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에어텔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릴라이언스는 당시 분당 4루피(120원)였던 통화요금을 10분의 1인 40파이스(12원)로 낮춰 시장을 공격적으로 점령해 갔다.
에어텔의 주가는 연일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이렇게 쓰러질 미탈이 아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정신무장을 강조했고, 실제로 소수 게릴라가 대군을 무찌르는 전쟁 영화 등을 자주 보여줬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에어텔의 아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릴라이언스가 시장점유율 2위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1위 자리는 빼앗기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에어텔은 인도를 비롯해 스리랑카, 케냐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19개국에 가입자 2억 4,300만 명을 보유한 세계 다섯 번째 이동통신사로 우뚝 섰다.
미탈은 통신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통, 금융서비스, 제조업, 소프트웨어 등으로 진출해 바르티 그룹을 만들었다. 바르티 그룹은 연간 매출액만 83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 월마트와 합작해 2008년 처음 세운 바르티 월마트도 2012년 현재 점포가 17개로 늘었다. 2009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아프리카 최대 이동통신사 MTN과의 합병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2012년에는 일본 소프트뱅크와 손잡고 모바일 인터넷 시장 진출을 발표하는 등 모바일 시장 개척에도 앞장서고 있다.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미탈은 '속도'라고 대답한다. 인도에서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것들을 가장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규모나 자금 면에서 대기업에 한참 뒤처졌던 미탈에게는 사업성이 있는 아이템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고 빠르게 실행하는 속도만이 최대 무기였던 것이다.
인도에서 '보기 드문' 통신 재벌
미탈은 인도의 교육 분야에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그는 바르티 재단을 세워 지금까지 200개가 넘는 학교와 도서관을 지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에 2009년에는 미국 금융 주간지 「배런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자선가 25인' 중 16위에 올랐고, 2010년에는 아시아 지역의 문화, 기부, 스포츠 등 12개 부문에 상을 주는 아시안 어워즈(The Asian Awards)에서 '올해의 기부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인도 정부로부터 최고의 시민상인 '파드마 부산(Padma Bhushan)'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포브스」는 미탈을 "인도의 통신사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은, 보기 드물게 때 묻지 않은 통신 재벌"이라고 평가했다. 통신사 부패 스캔들은 인도 정부가 2008년 2세대(2G) 이동통신사업자에 대한 주파수 할당 입찰과정에서 부적격 업체에 특혜를 제공해, 390억 달러(약 44조 5,000억 원)의 국고가 손실된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다. 2011년 이 스캔들이 터지면서 인도 의회가 4개월 넘게 마비되고, 대법원은 당시 허가를 받은 122개 이동통신 업체의 사업권을 취소한다고 판결하는 등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대기업의 추격과 통신 업계의 과열 경쟁 속에서도 바르티 에어텔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사회적 역할까지도 저버리지 않는 우직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닐 미탈의 슈퍼 리치 DNA! 추진력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향하는 로켓이 추락하지 않는 이유는 최초의 추진 동력을 과감히 버리기 때문이다. 동력 분리에 실패하면 로켓 전체가 추락을 면치 못한다. 기업도 이와 비슷하게 창업 초기에 회사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추진력이 회사가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기존의 추진력이 한계에 직면했을 때가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할 때다. 미탈은 기존 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사업에 도전하며 기업의 진화를 이끌었다. 최초의 추진 동력을 끌어안고 진화를 게을리 했다면 그는 여전히 인도 시골마을의 자전거 부품 공장 사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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