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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 슈퍼
리치

나이트

Phil Knight

운동화에 인격을 불어넣은 마케팅 귀재

요약 테이블
출생 1938년
필 나이트

ⓒ Getty Images/멀티비츠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골프장 그린 위에서 퍼팅을 성공시킨 뒤 오른손을 불끈 쥐는 타이거 우즈(Tiger Woods)와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덩크슛을 넣는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두 사람의 얼굴과 함께 자연스레 그려지는 이미지가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로고다. 우즈가 입은 티셔츠의 왼쪽 가슴과 조던이 신은 운동화에는 어김없이 나이키 로고가 붙어 있다.

제품 자체보다 브랜드의 로고를 더 갖고 싶게 만들었던 나이키. 전 세계 스포츠의 아이콘으로 부상해 스포츠용품 시장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이 회사는 전직 육상선수 필 나이트(Phil Knight, 1938년~ )와 그의 코치였던 빌 보워먼(Bill Bowerman, 1911~1999년)이 공동 설립했다. 필 나이트는 2012년 현재 144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세계 마흔일곱 번째 부자다.

'승리의 여신' 니케가 가져다준 엄청난 성공

나이트는 1938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중거리 육상선수였던 나이트는 오리건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면서 육상도 계속했다. 1마일(약 1.6킬로미터)을 4분 10초에 돌파한 것이 그의 최고기록이다.

대학 졸업 후 1년간 군대에 갔다 온 뒤 스탠퍼드대학 경영대학원을 다니던 나이트는 운명적인 수업을 듣게 된다. 프랭크 쉘런버그(Frank Shallenberger) 교수의 창업론 강의에서 자신의 기업가적인 자질을 발견한 것이다. 나이트는 "교수님이 기업가의 자질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진정 원하는 일을 찾은 순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1962년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나이트는 일본 여행을 떠났다. 이 때 고베에서 일본 운동화 제조 업체 오니츠카 타이거(현재 아식스)의 싸고 품질 좋은 신발을 보게 되었다. 육상 선수 출신이었기에 그는 편안하고 가벼운 운동화를 누구보다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트는 이 신발을 미국으로 수입해 팔기로 계약한 뒤 귀국했다. 하지만 당시 물건이 배로 운송되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렸고, 그 동안 그는 회계사와 포틀랜드주립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운동화가 도착하자 나이트는 자신의 육상 코치였던 빌 보워먼에게 운동화 두 켤레를 우편으로 보냈다. 운동화에 관심이 많았던 보워먼에게 품질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운동화도 팔아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보워먼은 "좋은 운동화를 만들 아이디어가 많다"며 동업을 제안했다. 1964년, 두 사람이 각각 500달러씩 내 차린 회사가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BRS)'다.

이들은 조그만 승합차에 수입한 신발을 싣고 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부터 직접 신발을 만들어 팔았다. 성공의 발판이 된 것은 보워먼이 고안해 낸 격자무늬 밑창을 깐 운동화, 일명 '와플 트레이너'다. 보워먼은 부인이 와플을 굽는 것을 보고 운동화 밑창에 와플의 격자무늬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후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 만든 밑창을 운동화 바닥에 붙이면서 와플 트레이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와플 트레이너를 만드는 데 사용된 격자무늬 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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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라는 브랜드 이름이 탄생한 건 1971년이다. 나이트의 대학 친구이자 BRS 첫 직원인 제프 존스(Jeff Johnson)가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연상해 이름을 지었다. 영어 알파벳 브이(V)자를 흘려 쓴 듯한 로고 '스워시(swoosh : 휙 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포틀랜드주립대학에서 나이트에게 회계학 강의를 들은 캐롤린 데이비슨(Caarolyn Davidson)이라는 여대생이 만들었다.

데이비슨이 1971년 로고 도안의 대가로 받은 돈은 겨우 35달러다. 세계적인 브랜드 평가 업체 밀워드 브라운(Millward Brown)이 평가한 2012년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 162억 5,500만 달러(세계 44위)에 비춰보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턱 없이 적은 돈이다. 그러나 당시 데이비슨은 설마 이 운동화 회사가 이 정도로 성장할지 미처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나이트는 2011년 오프라TV에 출연해 "나이키를 주식 시장에 상장할 때 데이비슨에게도 나이키 주식 수백 주를 줬다"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스포츠용품에서 '도전'의 아이콘으로

나이키가 단숨에 세계 최고 브랜드가 된 건 아니었다. 1980년대 미국에 에어로빅 붐이 일자 영국의 스포츠용품 업체 리복은 세계 최초로 여성용 에어로빅화를 만들었다. 이 신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리복은 당시 세계 1위였던 나이키를 앞질렀다. 고전하고 있던 나이키에 한 광고대행사가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광고에 제품이 아닌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여준 후, '일단 해봐(Just Do It)'라는 도전정신을 담자는 것이다. 이 전략으로 나이키는 스포츠용품에 상품 이상의 가치를 부여했고, 슬로건 'Just Do It'은 로고 스워시와 함께 나이키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에어조던1'을 신고 경기에 참가한 조던

마이클 조던과 타이거 우즈 두 천재 스포츠 스타는 시장 확대와 더불어 나이키에 스포츠용품 이상의 가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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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제품에 가치를 부여한 또 다른 주역은 나이키 로고와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 마이클 조던과 타이거 우즈다. 이들이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해 맹활약하면서 나이키도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나이키를 급성장시킨 모델은 누가 뭐래도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마이클 조던이다. 나이키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에어조던'은 1985년 조던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만든 신발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조던이 이 운동화를 신는 것은 NBA 규정 위반이었다. 당시 NBA는 통일된 색깔의 농구화만 신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흑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에어조던1'은 제재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 신발을 계속 신었고, NBA는 경기마다 5,000달러씩 벌금을 부과했다. 나이키는 조던의 벌금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지만, 그 금액과는 비교되지 않는 홍보 효과를 얻었다.

또 다른 일등공신은 타이거 우즈다. 우즈의 가능성을 엿본 나이키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며 계약을 맺었고, 우즈가 스타로 성장하면서 골프 부분에서 나이키의 영향력도 함께 커져갔다. 요컨대 조던과 우즈라는 두 스포츠 천재는 나이키를 하나의 상징인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나이키가 판매하는 것은 스포츠용품이 다가 아니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승리자의 영혼'을 함께 판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나이트의 마케팅 전략에 빠져들고 말았다.

노동력 착취로 만들어진 운동화

1990년대 제3 세계에 있는 나이키 하청 공장의 열악한 근로 환경이 공개되면서 "나이키=노동력 착취"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자, 나이키는 매출이 급감하는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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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마케팅 뒤에는 나이키를 둘러싼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1996년 국제 비정부기구(NGO) 옥스팜 인터내셔널은 "나이키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 세계의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력을 착취해 이익을 내고 있다"고 고발하는 보고서를 냈다. 같은 해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역시 자신의 책 『이걸 쥐어짜!(Downsize This!)』에서 "나이키 제품이 만들어지는 인도네시아의 공장에서는 임신부와 열네 살 소녀가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신발을 바느질하고 있다"며 나이키의 노동력 착취 실태를 폭로했다.

나이키의 도덕성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일었고 이는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으로 번졌다. 나이키의 매출도 급감했다. 나이트는 결국 불매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하청을 준 외국 공장의 노동 환경 개선을 약속하고 어린아이들을 내보냈다. 또 해마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을 공장으로 초청해 어린아이들이 없음을 보여주는 등 악덕 이미지를 벗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조건 있는 기부

나이트는 모교에 대한 천문학적 규모의 기부로도 유명하다. 그가 지금까지 오리건대학에 기부한 돈만 2억 3,000만 달러(약 2,600억 원)에 달한다. 기부금은 대부분 육상 등 체육 부문에 쓰인다. 스탠퍼드대학 경영대학원에도 이 대학원 역사상 단일 기부금으로 가장 많은 1억 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기부로 그가 누리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그는 오리건대학의 모든 스포츠 경기를 가장 좋은 자리에서 관람하는 것은 물론, 축구팀의 락커룸에는 그의 락커가 따로 있을 정도다. 대학 건물은 나이트와 가족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체육관은 나이트, 도서관은 그의 어머니, 법학대학원 건물은 아버지, 농구팀 이름은 스쿠버다이빙을 하다 사고로 숨진 아들의 이름을 땄다.

그러나 기부를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다. 나이트가 자신의 친구인 전직 보험회사 직원 팻 킬커니를 오리건대학 육상 감독으로 임명되도록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킬커니는 육상 관련 학위나 경험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나이트는 또 오리건대학이 2000년 전 세계 공장의 노동 환경을 감시·고발하는 학생들이 만든 노동자권리협의회(WRC : Workers Rights Consortium)에 가입하자 3,000만 달러의 체육관 건립 기부금 약속을 철회하고 더 이상 오리건대학에 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WRC에 가입한 대학은 학생 유니폼 제작 업체 등 거래 기업의 작업장 환경 및 임금 등 노동 조건을 감시하고, 윤리적인 기업하고만 계약을 맺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이트의 반발에 오리건대학은 결국 WRC 가입 계획을 철회했다. 그제야 나이트는 만족감을 드러내며 당초 주기로 했던 3,000만 달러 보다 많은 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의 기부가 순수한 의미의 사회 환원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나이트의 '조건 있는' 기부와 부당노동, 이것이 과연 페어플레이를 생명으로 하는 스포츠 분야 최대 기업이라는 위상과 '일단 해봐'라며 도전정신을 강조해 온 기업의 기업정신에 부합하는 걸까? 판단은, 소비자의 몫이다.

필 나이트의 슈퍼 리치 DNA! 전복(顚覆)

나이트는 "남보다 우월하려면 모범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순응한다면 앞서 나갈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올림픽을 '평화의 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결투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스포츠경기의 이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나이키는, 결투장에서 늘 상대를 압도한다. 1등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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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집필자 소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서 10년 넘게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중 7년을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증권사를 비롯한 시중은행 등 금융업계를 출입하면서 보냈다. IT와 미디어 분야에도 ..펼쳐보기

문향란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국제부·경제부·산업부를 거치며 국내외 다양한 슈퍼 리치의 삶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보라 집필자 소개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경제부를 거쳐 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담당하고 있다.

출처

세계 슈퍼 리치
세계 슈퍼 리치 | 저자최진주 외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부자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0.00001%의 슈퍼 리치 40인의 삶과 성공 전략을 추적한다. 추진력, 배짱, 치밀함, 강박 등 40인의 슈퍼 리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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