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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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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주식을 사기 전까지, 나는 인생을 낭비했다."
세계 최고 갑부 워런 버핏(Warren Buffett, 1930년~ )을 이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 또 있을까. 이미 은퇴를 해도 몇 번은 했을 여든의 나이까지 '투자의 귀재',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고 있는 버핏은 오로지 투자에 대한 열정으로 일생을 살아 왔다.
주식투자만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다
사실 버핏의 첫 '비즈니스'는 여섯 살 때 시작되었다. 껌과 콜라 등을 이웃에 팔아 한푼 두푼 돈을 모은 이 꼬마는 열 살 때 『1,000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One Thousand Ways to Make $1000)』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서른다섯 살에는 백만장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처음 주식투자를 시작한 것이 열한 살 때다. 직접 모은 전 재산 120달러에 누나 도리스의 돈을 보태 시티즈 서비스의 주식을 주당 38.25달러에 샀지만, 주가는 이내 27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얼마 후 주가가 40달러로 회복되자 버핏은 재빨리 주식을 팔아버렸다. 그런데 이 주식이 곧 200달러로 치솟았다. 개미투자자들의 전형적 실수를 그는 남보다 일찍 경험한 셈이다.
버핏은 투자에 대해서라면 신문이든 잡지든 뭐든지 읽고 연구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최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신문 배달을 하기도 했다. 신혼여행 때도 무디스가 발간한 기업 보고서를 들고 갔을 정도다. 그는 지금도 비행기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대신 신문을 읽는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입학 후 가치 투자의 창시자로 알려진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교수의 눈에 띈 것 역시 그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The Intelligent Investor)』를 거의 달달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엄으로부터 유일하게 A+ 학점을 받은 수제자였던 버핏은 졸업 후 그레이엄의 투자회사에 들어가 일했다. 그레이엄이 은퇴하면서 후계자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고사하고 고향인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로 돌아갔다.
1956년 스물다섯 살이었던 버핏은 자신의 쌈짓돈과 지인들의 투자금 등 17만 달러로 투자회사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십'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저평가된 회사의 주식을 사 모은 후, 수익을 배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투자하는 복리 방식으로 돈을 불려나갔다. 당시 다우지수 상승률은 연 평균 7.4%였는데, 버핏은 이 회사를 통해 매년 29.5%에 달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부를 일군 법칙, '15% 피셔, 85% 그레이엄'
1994년 첫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 『워런 버핏의 완벽투자기법(The Warren Buffet Way)』의 저자 로버트 해그스트롬(Robert G. Hagstrom)은 이렇게 말했다. "워런 버핏은 주식투자만으로 부를 축적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버핏은 어떻게 주식투자로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을까?
버핏이 자신의 투자법에 대해 설명한 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5% 피셔, 85% 그레이엄'의 법칙이다. 필립 피셔(Philip A. Fisher)는 성장주 투자, 벤저민 그레이엄은 가치투자의 원칙을 정립한 전설적 투자자다. 즉 성장투자 15%, 가치투자 85%의 포트폴리오로 지금의 버핏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레이엄은 재무제표와 청산가치(자산가치)를 중시했다. 망하더라도 손해를 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929년 뉴욕 증시 폭락 때 큰 손해를 봤던 그레이엄은 순자산가치와 주가수익률 등 재무비율을 엄격하게 적용해 저가매입 대상을 정했다. 투자 종목도 다양하게 분산하는 쪽을 선호했다.
반면 피셔는 재무상태보다 성장성을 중시했다. 그는 기업을 판단할 때 무엇보다 '경영'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고, "누가 다른 이들이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확신이 들면 해당기업 지분을 대거 사들여 장기 보유했다. 그는 1950년대에 매입했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모토로라 주식을 각각 1980년대와 2000년대까지 갖고 있었을 정도다.
버핏은 그레이엄의 수제자였으나, 실제 자신의 투자회사를 설립한 후에는 피셔 쪽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버핏은 주식을 살 때 경영자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설령 청산가치가 높아도 성장성이 불투명한 기업은 멀리했다. 또 10년 이상 장기간 지속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주식을 선호했다. 버핏이 언제나 시장에서 가격 결정력을 갖고 있는 지배적 기업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주식을 대규모로 매입해서 장기간 보유해온 것 역시 '피셔 스타일'이다. 버핏은 1989년 질레트 주식 9,600여만 주를 매수해 계속 보유해오다가 2005년 P&G가 질레트를 인수할 때 팔아 무려 43억 달러의 차익을 챙긴 바 있다.
투자하려거든 기업 경영을 장악하라!
버핏이 단순히 주식매매차익만 노렸다면 지금 같은 갑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회사를 인수하거나 경영권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 상당한 지분을 획득해, 주식의 가치를 직접 높이는 전략을 택했다. 1962년 그가 인수했던 버크셔 해서웨이는 당시 주가가 18달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만 달러가 넘는다.
할 수만 있다면 버핏은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했다. 그리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기업가치를 높였다. 100% 인수가 어려운 대형 기업에 투자할 때도, 가급적 대규모 지분을 매입한 뒤 이사회에 직접 진출해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위협에 놓인 기업에 대해 백기사 역할을 자처하되, 노회한 협상력으로 반드시 대가를 챙기는 것 역시 그의 장기다. 버핏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위기에 몰렸던 골드만삭스에 영구우선주(의결권이 없는 우선주의 일종으로, 만기가 없고 약속된 배당을 받지 못하면 다음해 이익을 통해 배당을 받을 수 있는 주식)를 매입하는 형태로 무려 50억 달러를 투자했다. 하지만 그가 챙긴 프리미엄은 엄청났다. 버핏은 우선주에 대해 10% 배당금을 보장 받았을 뿐 아니라, 5년 동안 주당 115달러에 보통주를 총 50억 달러 규모까지 살 수 있는 권리까지 얻었다.
버핏이 이 같은 투자 철학을 실현하면서 부를 축적한 핵심도구는 바로 버크셔 해서웨이였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여러 보험사와 재보험사까지 거느린 일종의 보험지주사다. 만약 신문에 "버핏이 A사 주식을 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면, 사실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자회사인 어느 보험회사가 보험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를 활용해 투자했다는 얘기다. 즉, 남이 맡긴 돈으로 대규모 레버리지 투자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이런 방법으로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당 순자산가치는 연평균 20%씩 증가했다.
사실 이런 투자법은 개인투자자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버핏의 투자 기법을 설명하는 수많은 책들이 "개인투자자들도 버핏처럼 재무제표를 열심히 분석하고, 가치 있는 주식을 저가에 사서 오랫동안 보유하다가 진짜 가치에 도달하면 팔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버핏에게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부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세상을 바꾼다
버핏은 돈 쓰는 데 유난히도 인색했다. 엄밀히 말하면 돈 쓰는 것에 대한 발상 자체가 남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100달러를 어떻게 쓸까?' 대신 '100달러로 투자하면 얼마를 벌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버핏은 수십 년 전 3만 달러를 주고 산 집에 지금도 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3만 달러를 10년만 굴렸으면 100만 달러가 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까워한다고 한다.
세계 최고 부자이면서도 자녀에게 돈을 그냥 주지 않는다. 돈을 빌려달라는 딸에게는 "돈은 은행에 가서 빌리는 것이지 부모한테 빌리는 것이 아니다. 축구팀에서 아버지가 유명한 센터포드였다고 그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도 2004년 부인 수전(Susan Thompson Buffett)이 뇌졸중으로 숨지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녀에게 용돈도 주기 시작했고 기부도 늘렸다. 특히 2006년에는 재산의 85%를 빌 게이츠가 세운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버핏은 게이츠와 함께 슈퍼 리치들을 만나고 다니며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부자의 책임에 눈뜬 그는 기부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경제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빠지자 "세금을 많이 내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국가에서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나 근로자들이 내는 소득세율에 비해 금융자본을 불려 얻는 이익에 대한 과세율은 낮다. 버핏은 2011년 8월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지난해 나는 소득의 17.4%를 연방세금으로 냈으나, 내 사무실 직원 20명의 (소득)세율은 33~41%로 모두 나보다 높았다"면서 "돈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노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즉각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의 '버핏세' 신설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1월 버핏세 도입을 주장하며 '버핏보다 많은 세율을 적용 받은' 버핏의 비서를 초청해 함께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버핏에게 지지를 보냈지만 미국의 일부 부자들은 버핏의 주장에 분개하며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버핏의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 구호는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정부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여당 쪽에서 먼저 '버핏세'라는 것을 제안했다. 논란 끝에 2011년 12월 31일 "3억 원 초과 소득(과세표준액 기준)에 대해 '38%의 최고세율'을 적용한다"는 내용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소득 기준이 너무 높아 전국에서 해당자가 겨우 6만 명에 불과하고 세수 증대 효과도 미미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버핏의 선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99%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버핏의 기부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를 '부자의 선의'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상당수의 부자가 기부는 고사하고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거나 배임, 횡령 등 각종 범죄로 형사처벌을 받는 것을 보면 "최소한 버핏의 발뒤꿈치만큼이라도 좇아라"라고 요구해야 할 듯하다.
워런 버핏의 슈퍼 리치 DNA! 상생
버핏은 돈을 버는 데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비정상적이고 이기적인 방법을 가능한 피했다. 그럼에도 투자금을 수십, 수백 배로 불려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는 투기꾼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가 '현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기업과 투자자가 상생하는 바람직한 투자를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공공의 선에 위배되지 않는 돈에 대한 철학이야말로 버핏을 세계 최고 슈퍼 리치로 만든 부자 DN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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