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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될 무렵이면, 매체에선 앞 다투어 수영복 유행경향을 소개하기 마련이다. 미니스커트와 더불어 가장 섹시하게 다가오는 패션 아이템, 가장 두드러진 수영복은 뭐니 뭐니 해도 비키니(bikini)일 게다. 과거 필자의 한 직장동료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미녀를 띄워놓고 올여름엔 반드시 섹시한 블랙 비키니를 입을 거라며 매일매일 다이어트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곤 했었다.
인류 최초의 수영복은 기원전 350년 그리스에서 여성들이 수영복을 입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다. 서기 2~4세기에 제작된 이탈리아 시실리 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모자이크 벽화에서는 비키니와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수영과 목욕을 즐겼던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여성의 수영복은 사회악으로 생각되어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남자들도 1830년대까지는 알몸으로 수영을 했다고 한다.
19세기 유럽에 번졌던 우울증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의사들은 수영과 일광욕을 권했고, 이에 따라 수영복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의 여성 수영복은 외출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긴소매와 무릎을 가리는 길이의 바지, 검은 스타킹에 운동화까지 착용한 모습이었다. 물에 젖어도 비치지 않고, 단 밑에 무게를 더해 물속에서도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했지만, 일상복을 입고 해변에 모여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만한 복장이었다. 이후 수영이 보편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보다 편하고 기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에 밀착하는 짧은 스타일로 변하게 된다.
어느 분야에서나 혁신의 아이콘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사회적 파급 효과가 무엇보다 큰 패션이야말로 역사적인 인물의 일화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수영복에서도 짧고 몸에 밀착하는 스타일 확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안네트 켈러만(Annette Kellerman)이라는 호주의 수영선수가 ‘물 속의 발레리나’로 소개되면서 커다란 수조 속에서 수중발레를 선보였다. 팔과 다리를 드러낸 그녀의 수영복은 당시 미국 대중의 정서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자연스레 큰 외설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논란의 여파로 인해 짧은 수영복은 소매가 달린 긴 바지 형태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달라붙는 실루엣으로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유명세를 타게 된 그녀는 이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수영선수라는 전문성을 살린 캐릭터로〈머메이드(The Mermaid)〉(1911년), 〈넵튠의 딸(Neptune’s Daughter)〉(1914년)등 10여 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갖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영복의 보수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는데 목둘레에서 옷깃이 사라지고 가슴 언저리까지 네크라인이 내려왔으며 팔에서 다리, 그리고 허벅지 중간까지 드러내는 스타일로 바뀌어갔다.
이후 노출의 강도를 점점 높이던 수영복이 바야흐로 그 출발점인 고대 그리스 시대 투피스 스타일의 노출형 수영복으로 다시 이어지기까지는 2000년도 넘는 시간의 간극이 필요했다. 1946년 마샬 제도 해역의 비키니 섬에서 진행된 핵실험이 화제를 모으자, 파리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Louis Reard)’는 새롭게 발표할 자신의 투피스 수영복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조그마한 천 조각은 핵폭탄보다 더 큰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의 성공 이후 수영복은 원피스형과 비키니형으로 나뉘어 불리었다.
또한 비키니는 베트남 전쟁과 산업사회의 부조리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 지방에서는 수영과 일광욕을 위해 비키니의 상의를 아예 벗어 던진 모노키니(monokini)가 유행하기도 했다. 1964년 디자이너 ‘루디 게른리히(Rudi Gernreich)’는 여성의 상체를 노출시키는 이 모노키니 수영복을 공식적으로 잡지 표지에 실으면서 미국 대륙을 토플리스(topless) 스캔들로 흔들기도 했는데, 비키니와 달리 모노키니는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유럽 일부 해안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말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비키니는 엄청난 유행을 타고 있다. 해마다 과감한 컬러와 디자인이 넘쳐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탱키니(tankini), 쓰리피스(3-piece)에서 포피스(4-piece)까지 다시 일상복과 접목된 스타일이 강세를 보이기도 한다. 에로틱한 느낌을 100퍼센트 배제할 수야 없겠지만, 과감하고 자유롭게 개성과 매력을 표출하는 비키니를 건강한 시선으로 즐겨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6만 달러짜리 수영복
첩보물의 대명사인 007 시리즈 1편 〈007 살인번호〉(1962년)를 본 사람이라면, 최초의 본드 걸이었던 스위스 출신의 우르술라 안드레스(Ursula Andress)의 상아색 비키니 수영복이 인상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수영복은 지난 2001년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6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거액을 주고 수영복을 사들인 사람은 식당 체인 ‘플래닛 헐리우드’ 공동소유주 로버트 얼(Robert Earl)로, “지금껏 경매로 판매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영화 소품”이라며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개장할 새 식당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이 영화에서 우르술라는 파격적인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선보여 이후 섹시한 이미지를 ‘본드 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세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우르술라 안드레스의 이 수영복은 최근의 시리즈인 〈007 어나더 데이〉(2002년)에서 할리 배리가 오마주처럼 재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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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숨 쉬는 일과 같다. 아담과 하와 이후, 혹은 유인원에서 털을 퇴화시키고 인간으로 진화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패션과 함께 웃고 울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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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핵폭탄이 항복한 패션, 비키니 – 패션에 쉼표를 찍다, 김정희, RHK,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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