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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열혈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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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머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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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는 여자의 옷이요, 바지는 남자의 옷이라는 고정관념은 참으로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체크무늬 주름치마 킬트(kilt)나 일본의 민속의상을 보면 남자도 치마를 입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으로 남아있으며, 건강을 위해서는 오히려 남자가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의학적 이론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남자의 치마 착용이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습에 의해 자연스럽게 구분지어진 반대 성의 옷차림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들은 일종의 ‘페티시즘’으로 구분되면서 이질적인 취향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몇 년 전 인터넷 카페에 치마를 사랑하는 남자들의 모임이 생겨났다는 단신이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고, 모 신용카드 광고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를 등장시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남자의 치마란 흔하지 않고 상식 밖의 일이다.

자, 이제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바지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모임은 결코 뉴스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치마도 바지도 다양하게 입을 수 있는 것은 여자들만의 특권일까?

여성이 보편적으로 바지를 입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생 시몽(Saint Simon)의 사상을 이어받은 생시몽주의자들은 1848년 2월 혁명 이후 남녀평등 사회를 위해 여자도 바지를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고 폭넓은 드레스 대신 바지라니, 초기에는 무척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이 주장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조금씩 확산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으로 전파되어 여성운동의 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인디언 여자들이 바지를 입었던 사실은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여성의 바지에 대해 언급하자면 ‘블루머(bloomer)’라는 옷의 시초가 된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의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1849년 월간 여성신문 『릴리(Lily)』를 통해 무릎길이의 헐렁한 반바지인 블루머 입기 캠페인을 벌여 일부 여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 풍습으로는 이것이 반사회적이고 지극히 부도덕한 옷이어서 크게 지탄을 받았고, 몇 해가 지나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다시 이 블루머 바지를 발표하여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는데, 블루머파와 반블루머파(anti-bloomer)의 집회까지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1890년대 여성들의 블루머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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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블루머’는 19세기 후반 자전거의 빠른 발전과 보급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지리적인 삶의 영역을 넓히고 빠른 속도가 주는 쾌감으로 급물살을 탄 자전거 바람은 여성의 옷차림과 생활양식, 사고방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채 집안에 갇혀 살던 유럽과 미국의 중상류층 여성들은 타인에 의한 움직임이 아닌, 혼자서 내달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좀 더 편안하면서도 새롭고 합리적인 옷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들이 즐겨 입은 것이 바로 아멜리아 블루머가 제안했던 ‘블루머’였다. 종아리는 스타킹이나 긴 구두로 가리고, 간편한 윗옷에 멋진 모자를 쓴 활동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보게 된 것이다.

존 리치, 〈Ladies of Creation; Bloomerism〉, 18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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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되자 롤러스케이트의 유행에 이어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자전거 열풍은 사그라지게 된다. 그러나 1890년대의 자전거 열풍은 여성의 생활양식과 옷차림, 행동, 더 크게는 사고 자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여성운동의 길잡이가 되어 20세기 여성참정권 획득에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어느 여성운동가는 19세기 후반의 자전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성의 해방과 독립의 길잡이였고 그것은 구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바지를 입게 되면서 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생각한다면, 자전거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고방식의 진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될 테니까 말이다.

Bean Pole Kids, 2005년 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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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집필자 소개

1971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의류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패션마케팅 및 의상사회심리를 전공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96년부터 삼성패션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자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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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쉼표를 찍다
패션에 쉼표를 찍다 | 저자김정희 | cp명RHK, 알에이치코리아 도서 소개

패션은 숨 쉬는 일과 같다. 아담과 하와 이후, 혹은 유인원에서 털을 퇴화시키고 인간으로 진화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패션과 함께 웃고 울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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