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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는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에 해당하는 매우 광대한 지방으로 그곳에 사는 갈리아인은 싸움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당시에 이미 북부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지방은 로마의 속주로 되어 있었으나, 그 이북의 지역은 아직 로마가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북방의 게르만인들이 서서히 갈리아의 북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더는 갈리아 지방을 방치할 수 없었다.

머리 좋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임기가 끝나자 5년 동안 장기간에 걸쳐 갈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하겠다는 제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계획은 성공만 한다면 시민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4개의 군단을 이끌고 대장정에 나섰다.

당시 갈리아 지방은 울창한 삼림 지대였다. 갈리아 사람들은 숲 속에 숨었다가 갑자기 로마군을 기습해오는 게릴라전을 폈기 때문에 실로 힘든 여정이었다. 카이사르는 쇠약해진 병사와 병에 걸린 병사들에게는 몸소 간호해주며 병사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한번은 수많은 갈리아인이 불시에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적의 내습이다!"

"무기를 들어라!"

로마군은 소리치면서 바로 대항했으나 자고 있던 중에 당한 일이라 로마군 진영은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재빨리 무기를 갖춰 들고는 여러 부장들을 격려하면서 자기가 제일 먼저 적의 대열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것을 본 부하 장병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장이 위험하다!"

"대장을 구하라!"

그들은 일제히 용감하게 맞서 적을 무찔렀다. 그 후 카이사르는 부하들로부터 점점 더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활약과 인품은 로마에도 전해져 로마 시민 둘만 모여도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카이사르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야."

"누가 뭐라 해도 카이사르가 최고야."

심지어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마저도 시민들의 분위기를 의식하여 카이사르의 공로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개선하여 정권을 한손에 쥐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아직도 어려운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게르만인들을 내쫓는 일이었다. 이들 게르만인들은 갈리아인보다 더 억세고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었다.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애써 정복한 갈리아를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이룩해 놓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물거품이 될 소지마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투지를 불러 일으켜가며 게르만인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그들을 라인 강 너머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안심할 수 없었다. 게르만인들이 언제 다시 강을 건너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게르만인의 본거지를 쳐서 아예 근심의 싹을 없애기로 작정했다.

라인 강 건너편 게르만인의 땅은 갈리아보다 더 험하고 숲으로 둘러싸인 미개지였다. 로마인에게는 기후도 맞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지만 카이사르는 그곳까지 침입해 들어가 로마의 힘을 과시했다.

뒤이어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북쪽 해안을 통해 두 차례나 브리타니아각주1) 에 침입해 들어갔다.

이렇게 카이사르는 5년간에 걸쳐 알프스 이북의 전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뒤 그들로부터 로마에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들의 약속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로마군을 몰아내고 옛날의 자유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카이사르가 5년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브리타니아인과 게르만인들까지 포함한 전 갈리아 지방에서 아르베르니족의 왕 베르킨케토릭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을 일으켰다.

"카이사르의 지배를 받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자."

갈리아인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기세 앞에 용맹스럽던 로마군도 당해내지 못하고 각처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카이사르는 곧바로 갈리아로 돌아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외로 쉽지 않았다. 반란군과 카이사르는 일진일퇴의 싸움을 계속 해나갔다. 그 사이에 반란군의 세력은 갈리아 전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반란군의 주력을 무찔러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기로 하고, 적의 주력 8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끝에 아레시아각주2) 란 곳으로 몰아 넣는 데 성공했다. 아레시아를 포위한 병력은 무려 11개 군단이라는 대병력이었다.

그러나 아레시아의 성벽은 아주 튼튼했고, 성 안에 포위된 반란군의 기세도 대단해서 용맹한 카이사르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성을 계속 포위하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완전 차단한 뒤, 적이 스스로 항복해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각지의 갈리아인들이 아레시아 성 안에 포위된 주력군을 구하기 위해 모여들어 로마군을 포위했다. 그 수는 24만 명에 달했다.

카이사르는 앞뒤로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이 사실을 안 로마의 군사들은 겁에 질려 그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큰일났다. 이러다간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포위망을 뚫기로 각오하고, 번개처럼 빠르게 수많은 적들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전력을 다해 적들을 물리쳐라. 우물쭈물하다가 성 안의 적들이 몰려나오는 날에는 우리가 전멸하고 만다."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4일간에 걸쳐 맹렬하게 싸운 끝에 아레시아의 구원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발 아래 무기를 버리는 베르킨 게토릭스

카이사르는 골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재정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골 정복에 끝까지 대항했던 것은 켈트족의 베르킨게토릭스였으나, 기원전 52년 결국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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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성 안에 있던 반란군도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카이사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직 남은 소수의 반란군들이 저항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다음해 말이 되어서야 모든 반란세력을 평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전후 9년에 걸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에 갈리아인의 3분의 1이 전투에서 희생되었고, 3분의 1은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반면 카이사르는 엄청난 전리품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정복지에 대한 과세를 통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그 동안에 졌던 채무를 모두 정리하는 한편, 자기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많은 돈을 풀어서 그들을 자신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포로가 된 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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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을 통해 유럽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그 정복에 의해 로마의 문화는 지중해 주변으로부터 유럽의 내륙으로까지 뻗어나가게 되었으며, 이후로 그리스·로마 문화에 기반을 둔 유럽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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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묵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논문에는 <볼셰비키 집권 원인에 관한 고찰>, 저서로는 <이야기 러시아사> 등이 있다.

우종익 집필자 소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했으며,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출처

이야기세계사1
이야기세계사1 | 저자김경묵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고대 오리엔트에서 중세까지 세계사이야기! 인류의 탄생을 알렸던 선사 시대, 근대 문화의 모태를 이룬 그리스 시대와 세계 제국의 꿈을 이루었던 로마 시대, 그리고 지금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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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갈리아 정복이야기세계사1, 김경묵,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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