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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황제(306~337년)가 되기 전부터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앙을 버리고,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그가 312년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던 중,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높이 걸린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그 옆에는 또 '이것으로 승리하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는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며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더니 십자가에 군기를 걸고 싸우라고 계시해 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말대로 행한 끝에 연전 연승, 드디어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과 시민의 지지를 얻은 그는 313년에 공동 황제인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견한 뒤, 속주 총독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소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신앙 자유의 원칙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다. 그 뒤 동방 지역을 지배하던 리키니우스가 약속을 어기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표지를 단 승리의 군기를 앞세우고 출정하였다. 그리고는 리키니우스를 참패시키고 제국을 통일하여 실질적인 단독 황제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교를 계속 옹호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몸소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로마 황제로서는 국민의 다수가 아직 이교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광대한 지역을 단독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교도를 탄압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도 감안하였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박해 때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고, 공역(公役)을 면제해 주었으며, 연금을 주어 성직자를 우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교에게는 민사소송을 재판하고 교회 내에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교회가 유산을 상속할 권한도 갖게 하였다. 아울러 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세우기 위하여 교회 내의 교리를 둘러싼 대립을 해결하려 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소아시아의 니케아에 각 교회의 사교·장로 등 300명의 성직자를 소집하여 종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황제 자신이 사회를 맡았고, 비용도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자 아리우스파, 알렉산더파, 중도파 등 세 파로 나뉘어 제각기 성서를 인용해 가며 자기들의 주장만을 고집할 뿐, 조금도 양보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동일한 본질인가, 아닌가?"
이 문제를 두고 회의는 거듭해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은 알렉산더파의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는 해석이 옳은 것이라고 결정되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유사한 본질일 뿐, 같은 신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던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판정되어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聖靈)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신조로 삼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내부의 교리문제를 마무리 지은 콘스탄티누스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에 위치한 도시 비잔티움(Byzantium)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330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천연의 양항(良港)인 동시에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그가 이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고트족의 침입에 대비해 도나우 국경을 강화하려는 목적 외에도 그리스도교 정책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1000년여의 전통과 400여 개의 이교(異敎)신전을 갖고 있던 로마 시에서 그리스도교의 국교화를 추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여러 개의 큰 교회를 세우고 광장의 개선문에는 성서의 중요한 장면들을 새겨 넣어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강조했다. 그리고 로마에 견주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 전체를 7개의 언덕과 14개의 구(區)로 나누고 원로원까지 설치하였다.
그러나 337년, 이 위대한 황제가 죽자 로마의 평화는 금방 깨지고 말았다. 그의 사후 처음에는 세 명의 아들이 제국을 분할통치하였다. 하지만 형제 간의 우애가 좋지 못했을 뿐더러 다른 야심가들까지 합세하여 제위를 노리는 정권쟁탈전이 벌어진 끝에, 장남과 이남은 죽고 삼남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2세 황제(337~361년)가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파의 지지자였으며, 많은 황족을 살해한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참혹한 학살 중에도 그의 조카 율리아누스는 나이가 어리다고 죽음을 면하였는데 나중에 콘스탄티우스 2세를 이어 황제가 된다.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361~363년)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믿은 배교자(背敎子)였다. 그는 폭력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는 않았으나 철학, 수사학 등의 교사이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추방하고 황제 자신이 글을 써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비방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교양을 동원하여 이교(異敎)의 부흥과 개혁을 단행해 나갔다. 그가 목적한 종교는 그리스와 이집트 및 페르시아의 모든 종교적 관념과 습속을 혼합한 것이었다.
만일 이 황제가 오랫동안 집권했더라면 서서히 국교화되어 가고 있던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위험에 놓이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불과 2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는 티그리스 강변에서 페르시아와 교전하던 중 적병이 던진 창에 맞아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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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 이야기세계사1, 김경묵,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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