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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Marcus Antonius and Cleopatra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눈 끝에 카에사리온이란 아들까지 낳은 바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다급히 이집트로 귀국하여 자기가 로마로 떠날 때 형식상으로 세워 놓았던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아들 카에사리온을 왕으로 세운 뒤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모두 소탕한 뒤 동방 속주에서의 자기의 명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소아시아 지방을 순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클레오파트라를 키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호출했다. 호출 이유는 그녀가 원로원파를 돈으로 매수했다는 풍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 보려는 의도였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호출 명령을 받은 클레오파트라는 즉시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그녀는 과거에 카이사르를 유혹해서 정권을 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힘을 빌어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켜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한 배 위에서 화려한 향연을 베풀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들뜨게 했으며, 재치 있고 매력이 넘치는 사교술과 요염한 자태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그 본분마저 잃어버렸다.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미루어놓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월을 보냈다.
이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남편을 로마로 끌어오기 위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남편의 부하 한 사람과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싸움을 붙이자, 그러면 남편은 틀림없이 로마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의 생각대로 사건이 발생하자,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풀비아는 돌아온 남편과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귀국한 안토니우스를 이해 화해를 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도 불러 3년 전에 성립시켰던 삼두정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때에 3인은 각자의 지배 영토를 분배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에스파냐를,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차지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아내를 잃은 안토니우스와 자신의 과부 누이인 옥타비아를 결혼시켜서 유대를 굳게 다져갔다.
이제 삼두정치는 세 사람의 균형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해졌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하여 로마의 곡물 수입을 방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삼두 체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해도 해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던 중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6년에 그의 유명한 부하 아그리파를 보내서 섹스투스의 세력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인기를 한몸에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력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게 됨으로써 군사력에 있어서 로마의 최강자가 되었다. 곧이어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실각시켜 아프리카 속주까지 차지하여 명실공히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반면에 안토니우스는 몇 년 전에 중단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 로마를 떠날 구실을 찾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대동하고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 여자의 품 안으로만 파고드는 장군의 지휘 밑에서 원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결국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많은 유능한 장병들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안토니우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페니키아, 시리아, 키프로스 등의 로마의 속주들을 자기 멋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는 일종의 매국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시민들은 흥분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나일 강의 마녀다. 그런 여자에게 놀아나는 안토니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처벌해야 한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점점 더 인기가 상승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로마 시민들이 그를 욕하건 말건 간에 그에게는 오직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다는 것만이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33년에는 그의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정식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로마에서 공표되었다.
내가 죽거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옆에 묻어달라.
이쯤 되자 로마 시민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를 당장 로마로 끌어와 시민 앞에 세우고, 마녀 클레오파트라를 우리의 손으로 쳐죽이자."
이런 분위기를 타고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집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은 이집트에 대한 도전장이라기보다 안토니우스 세력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선언이었다.
운명이 걸린 이 전쟁을 맞이하고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육군은 비록 예전만은 못해도 아직 옥타비아누스보다는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에 따라 해전으로 승부를 내기로 결정했다.
전쟁은 그리스 서북쪽 악티움에서 기원전 31년 9월 1일에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얼마간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결판도 나기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가 싸움터에서 빠져나가자, 안토니우스도 허겁지겁 뒤를 쫓아 달아났다. 그의 부하들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계속 싸우다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악티움의 패전으로 몹시 상심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불행하게 되었다고 슬퍼하면서 지하 묘실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시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다.
"여왕께서는 장군의 불행을 슬퍼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안토니우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클레오파트라여, 외로워 말고 나를 기다려라. 이제 나도 네 곁에 가리라."
이 말을 남기고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배를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즉시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순간에 클레오파트라의 시녀가 다시 나타났다.
"여왕께서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시녀는 깜짝 놀라며 안토니우스를 지하 묘실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성 어린 치료에도 불구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안토니우스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는 쉽게 함락되었다.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기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행렬에 내세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마지막 결심을 했다. 몸을 단정히 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는 독사에 물려 자살하고 말았다.
저는 로마의 위대한 영웅을 파멸시킨 불행한 여자입니다. 비록 저의 잘못이 클지라도 그대의 부친 카이사르를 생각해서 저의 시체를 욕되게 하지 마시고 무사히 장례를 치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렇게 해서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던 헬레니즘 왕국들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남아 있던 이집트마저 멸망하고 로마의 지중해 통일이 완성되었다. 아울러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100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로마의 내란도 모두 끝나 사람들은 "옥타비아누스 만세!"를 외치며 평화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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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이야기세계사1, 김경묵,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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