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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두스

헤라클레스 차림을 한 코모두스 황제. 당시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을 신이나 영웅과 동일시함으로써 권위를 내세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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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를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때까지의 관례를 깨뜨리고 친자식인 코모두스(Commodus) 황제(180~192년)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코모두스는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우둔하고 퇴폐적인 인물이었으며, 정치는 아첨하는 측근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향락에만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영웅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검노로 분장하여 투기장에 나가기도 하는 등 네로와 비슷한 폭군의 길을 걸었다. 또 그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근위대의 봉급을 인상하여 국가 재정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돈이 부족해지면 유력자의 재산을 함부로 몰수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는 근위사령관과 첩의 공모에 걸려들어 욕실에서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자 마치 네로가 몰락한 뒤의 상황처럼 군대에 의해 황제가 추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서로 간에 싸움을 벌인 끝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가 황제(193~211년)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근위대의 개혁에 착수하여, 이때까지 정치에 개입하여 황제에게 법이 정한 이상의 봉급을 요구하고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모반을 서슴지 않던 이탈리아인 중심의 부패한 근위대를 해산하였다. 그 대신 지방 군단 출신자를 많이 채용하여 새로운 근위대를 편성했다. 이 당시 원로원은 예전에 비해 그 권위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는데, 새로운 의원들 중에는 동방 및 아프리카 출신들도 많았다. 세베루스 자신도 아프리카 출신으로서 카르타고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었으니 그 옛날 로마의 숙적이었던 한니발의 자손이 로마의 황제가 된 셈이었다.

세베루스는 국경의 방위에 특히 신경을 써서 군대를 우대하였다. 죽으면서도 그는 두 명의 아들에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마음을 합쳐라.
병사들을 잘 대우할 것이며, 다른 일에는 되도록 신경을 쓰지 말아라.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합쳐라'라는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형 카라칼라(Caracalla) 황제(211~217년)는 1년간 공동통치를 하다가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군대를 잘 대우하라'는 유언은 잘 지켜, 병사의 봉급을 대폭 인상하는 등 군대의 처우개선에 힘썼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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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 황제가 행한 중요한 시책은 212년 안토니우스 칙법으로써,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이에 따라 이탈리아 본토와 속주, 그리고 정규군과 보조군과의 차별이 없어졌다. 이러한 시민권의 대량 수여는 이미 재정 초기부터 시작되었던 일로써, 그가 이 시책을 실행한 목적은 로마 시민에게만 부여되는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를 속주민들에게도 부담시켜 재정 수입을 늘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공공시설에도 신경을 썼는데, 그 당시 커다란 공중 목욕탕이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 규모는 한번에 1천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고, 냉탕·온탕·한증탕·홀·도서실·경기장·점포 등의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한편 카라칼라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유역 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동방의 숙적 파르티아에 대한 정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한 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근위사령관 마크리누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공중 목욕탕

카라칼라 황제가 세운 공공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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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리누스(Macrinus) 황제(217~218년)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서, 기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죽이고 난 뒤에 황태후(皇太后)마저 추방하였다. 하지만 그는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체결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인기를 잃었다.

이때 그에게 추방당해 병들어 죽은 황태후의 누이 마에사가 빼앗긴 세베루스 가의 제위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녀는 세베루스나 카라칼라 황제를 숭배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마크리누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14살짜리 손자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 소년은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모시는 신관 가문에서 태어나 엘라가발루스라고 불렀다.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황제(218~222년)는 군대의 지지를 받으며 태양신의 상징인 원추형의 검은 돌을 들고 로마로 입성하여, 그 신전을 팔라티노 언덕에 세웠다. 이로써 로마는 아프리카 출신 황제에 이어 동방 출신 황제와 그곳의 신까지 떠받들게 되었다.

나이 어린 이 황제는 정치적으로는 거의 무능력자였으나, 음욕에 있어서는 일찍 눈을 떴다. 그는 재위 기간 4년 동안에 5명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중에는 정절을 계율로 삼는 베스타 여신전의 무녀도 끼어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갈리아 출신의 노예와 동성애를 즐기기까지 해서 17세의 나이에 엄청난 추문을 남겼다. 그러자 황제의 조모 마에사는 또 다른 손자를 황제의 양자로 지명하여 그를 제위에 올려놓으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미리 손을 쓰려 했으나 군대가 먼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마에사가 지명한 다른 손자를 제위에 앉혔다. 이 황제의 이름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황제(222~235년)였는데 이때 불과 13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종교를 로마의 전통에 따라 운영해 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고명한 법학자이면서 근위사령관으로서 자신을 보좌하던 울피아누스가 근위대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다가 오히려 부하들의 손에 살해된 후 군대의 통수권을 상실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도 북방의 변경을 침입해 온 알라마니족에게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제국 각지에 주둔하는 군대가 제각기 자기들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여 235~284년까지 불과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난립하게 되었다. 이들 황제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제위에 오르지 않고 군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력으로 추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시기를 군인황제 시대라고 한다.

대리석에 조각된 로마의 근위병

황제의 경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수도 로마를 방어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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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황제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황제(286~305년)는 트라키아의 농민 출신이었다. 그는 사병으로 군대에 들어가서 커다란 체구와 괴력을 기반으로 당시 라인 강 지역 최고 사령관의 지위에까지 올라 있었다. 하지만 농사꾼 출신이 황제가 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원로원에 불만을 품고 로마로 진격하는 도중 부하 군인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내외정세의 혼란 속에서도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248년 아라비아 출신의 필리푸스(Philipus) 황제(244~249년)가 로마 건국 천년제를 성대하게 열어 로마의 전통과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으키려 하였다.

또한 비련의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253~268년)는 제국의 재건에 노력하여 기병의 기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사체제를 마련하였다.

그 뒤에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황제(270~275년)는 동방의 전술을 도입하여 국방력을 강화시켰고, 아울러 수도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이때에 이미 로마는 대성벽을 쌓지 않으면 수비가 염려될 만큼 이민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당시에 동서통상의 요지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시리아 사막 내의 오아시스 국가 팔미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수차례의 격전 끝에 함락시키고 그 여왕을 로마까지 끌고와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10년간이나 로마로부터 분리해 있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회복하고, 경제에도 통제를 가해 과거의 로마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 했으나, 그도 역시 마지막에는 살해되고 말았다.

그 뒤에 나타난 황제들은 군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기를 지지하는 군대를 위해 원로원 의원 및 부유한 시민의 재산을 멋대로 몰수하였다.

"어제의 부자도 오늘은 거지."

이 말이 그 당시에 있을 정도였으니 그 혼란은 가히 짐작할 만했다. 여하튼 이러한 혼란기를 통하여 중앙의 구지배층이 몰락하고 지방에 기반을 둔 대토지 소유자들이 큰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새로운 지배층의 자립적 경향은 차츰 더 심해져서 근본적인 개혁이 없는 이상 로마 제국은 전면적인 해체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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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묵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논문에는 <볼셰비키 집권 원인에 관한 고찰>, 저서로는 <이야기 러시아사> 등이 있다.

우종익 집필자 소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했으며,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출처

이야기세계사1
이야기세계사1 | 저자김경묵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고대 오리엔트에서 중세까지 세계사이야기! 인류의 탄생을 알렸던 선사 시대, 근대 문화의 모태를 이룬 그리스 시대와 세계 제국의 꿈을 이루었던 로마 시대, 그리고 지금의..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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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혼란의 3세기이야기세계사1, 김경묵,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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