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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반격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각국의 국가 형태가 아직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황의 지휘하에 각국의 기사들이 일치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침입을 막을 만한 조직과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 하지만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이슬람 세력권에서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유럽에서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을 성전(聖戰)으로 생각한 것처럼, 이슬람 세계에서도 예루살렘 탈환을 그들 나름대로 성전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세력이 점점 커지자 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프랑스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주력부대는 소아시아에서 이슬람에 대패를 당했으며, 다마스쿠스 공격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12세기 후반에 이르자 제1차 십자군으로 세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왕국은 날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위대한 장군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살라딘은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한번은 포로가 되어 살라딘에게 끌려나온 그리스도교 왕국의 지도자인 뤼시냥이 죽음을 의식하고 몸을 떨자 살라딘은 시원한 물을 건네주며 "왕자가 왕자를 죽이는 일은 그다지 훌륭한 일이 못 됩니다."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 후 다마스쿠스로 보내어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87년 9월 20일,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제1차 십자군과 맞서 싸우다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이 학살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난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십자군 병사들이 그처럼 잔인했던 데 비해 살라딘은 뜻밖에 너그러웠다.
"예루살렘이 항복한다면 전 시민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을 것이다. 단 남자는 1인당 금화 열 닢을 내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고 여자는 두 닢, 어린이는 한 닢이면 된다. 몸값을 치룰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빌려주겠다. 몸값의 지불 기간은 40일간이며 이 기간을 넘어서도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로 삼을 것이다."
40일이 지나도 몸값을 치르지 못한 빈민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 그러자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이 그 가운데 1천 명을 요구했다.
"무엇을 하려는 거냐?"
학살을 염려한 살라딘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님, 우리는 그리스도교도들처럼 사람을 무참히 죽여서는 안 됩니다. 알라께 바치는 뜻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살라딘은 곧 동생에게 1천 명을 내주었었고, 그들도 곧 해방되었다. 그리고 몸값을 치르지 못하는 노인들도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서양의 한 역사가는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되찾아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억에 남을 만하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애를 발휘한 너그러운 정복자였다는 점에서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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