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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사회의 성립
유럽의 중세 사회를 봉건 사회(封建社會)라고 하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체제가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는 프랑크 왕국 시대에 가신 제도와 은대지 제도가 결합함으로써 성립하게 되었다.
가신 제도는 본래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자신의 몸을 맡김으로써 성립하는 주인과 종자의 관계였다. 그것은 상전이 보호를 요청하는 가신에게 보호와 부양의 의무를 지고, 가신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전에게 복종과 봉사의 의무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혼란한 시기에 서로 의지하기 위한 일종의 계약적인 관계로 자연스럽게 성립되었다.
상전이 가신의 생계를 돌보아 주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부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토지를 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토지를 빌려주는 방식은 로마 시대의 은대지 제도의 방식을 모방한 것인데 이런 토지를 봉토(封土)라고 불렀다.
봉건적인 군신관계는 신하가 주군될 사람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고 주군되는 사람이 신하에게 봉토를 수여함으로써 성립한다. 충성의 서약의식은 신하될 사람이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두 손을 주군의 손 사이에 넣어 그의 신하가 될 것을 서약하고, 이어 성경이나 성스러운 유물을 걸어 모든 의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군은 봉토의 상징으로 한 줌의 흙을 신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맺어지는 군신계약은 서로에게 의무를 부과했다. 주군은 신하에게 보호와 부양의 의무를 졌으며 신하는 주군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고 주군의 법정에 참석해야 했다. 만약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주군은 신하에게 내린 봉토를 몰수할 수 있으며, 반대로 주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신하가 권리를 주장하고 항의할 수 있었다.
봉토를 매개로 한 이러한 군신관계는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국왕을 정점으로, 공작이 국왕의 봉신이 되고, 백작이 공작의 봉신이 되는 형태로 많은 중간 단계를 거치면서 폭이 넓어지고 맨 밑에는 평기사들이 차지하는 피라미드형의 계층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봉건적 계층제의 구성원 사이에는 상·하의 구별이 있고, 보유한 토지의 크기와 그에 의한 권력 크기에 따라 신분적인 위치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봉토를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군주와 같은 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봉건 제도는 자연히 지방분권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연관을 맺으며 결합하여 중세 유럽에 독특한 봉건 제도를 형성하게 된 것은 역시 민족 이동 후의 혼란스런 상황의 결과였다. 봉건 제도 성립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격퇴한 카를 마르텔이다.
마르텔은 이슬람교도를 격퇴하기 위하여 종전의 보병 대신 대규모의 기병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기병의 경우에는 먼저 말이 있어야 하고 또 말을 사육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르텔은 유능한 병사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기병으로서 전쟁에 참가시키는 대신에 토지를 수여하였다.
이러한 마르텔의 조치는 봉건 제도 성립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봉건 제도가 완성된 것은 카를 대제의 제국이 무너지고 노르만의 침입, 이슬람교도의 공격, 마자르족의 침입 등이 격심했던 9세기에서 10세기였다.
이때의 국왕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어서 주민들이 지역 단위로 이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곳곳에 성을 쌓고 소성주(小城主)들은 대(大)성주 밑에 모여 싸웠던 것이다. 이들 대성주들은 백작, 공작 등의 칭호를 가진 지방의 실력자요, 실질적인 군주로서 그 영역은 독립국가나 다름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인데, 국왕은 이름뿐이며 여러 개의 독립국가로 이루어진 연방체와 비슷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도 봉건 사회가 성립할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로마 말기부터 시작되어 민족 이동 후에 더욱 심해진 이슬람교도의 팽창으로 유럽이 지중해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졸지에 다른 세계로의 출구가 막힌 셈이어서 유럽 사회는 자급자족을 하는 폐쇄적인 자연경제로 변해갔다. 상공업의 쇠퇴, 화 폐 사용과 유통의 급격한 감소, 상공업의 중심으로서의 도시 소멸 등으로 인해 유럽은 자연경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토지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결국 싸움을 할 수 있는 기사층과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고 나머지 일반인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예속적인 관계가 되었다.
봉건 제도가 토지를 매개로 하여 성립할 만큼 중세의 생활 영역은 장원각주1) 이라는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피라미드 조직에 낀 사람은 누구나 장원의 영주였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많은 장원을 가지고,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적게 가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평기사들 중에는 하나의 장원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장원은 영주들의 주요 수입원이고, 봉건 제도라는 중세의 질서를 지탱해 나가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 내부는 장원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중심에는 영주가 사는 성이나 저택, 교회가 딸려 있었고, 그 옆에 농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경작지와 농민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임야(林野)가 있었다.
영주와 농민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보호자와 피보호자,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 그것이었다. 영주는 그의 재판소에서 농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그들에게 경찰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장원에는 대장장이 등의 수공업자도 살고 있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장원 제도의 기반 아래 영주는 독자적인 힘을 키울 수 있었고 봉건 제도라는 중세의 틀 아래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봉건 제도가 처음으로 꽃을 피운 나라는 프랑스였고,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밖에 독일과 북부 유럽에서도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봉건 제도가 발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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