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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표충비
사명대사비, 表忠碑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번지 홍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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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밀양 |
표충비(表忠碑)는 사명대사각주1) 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으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順安)에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했다.
표충비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큰 비석이다. 무안지서(파출소)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음각했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사명대사 임유정 스님이 무안면 고라리에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나고 67세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54년에 걸친 승려생활을 한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구국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 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의 행장을,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의 내력, 그리고 기허대사의 비명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짓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글씨를 썼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했다.
홍제사는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가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으나 사당이 영정사(지금의 사찰 표충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작은 원당과 삼비문(三碑門)을 세운 것이 그 출발이었다.
표충비 - 땀 흘리는 비석
표충비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석 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이슬처럼 몇 시간씩 계속해서 흐르다가 그치는데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밀양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신기한 현상을 두고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현상이라고도 하고, 비석 자체의 결로 현상에 연유한 것이라는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표충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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