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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소재지 |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 125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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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남해 |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군으로 들어서서 가다 보면 곧 오른쪽에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를 만나게 된다.
1598년 11월 19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도주하는 일본군과 관음포 앞바다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날 이른 아침 관음포 앞바다에서 도주하는 적선을 추격하다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가장 먼저 육지에 오른 곳이다. 그 후 충무공의 유해는 남해 충렬사를 거쳐 1599년 충청남도 아산에 모셔졌다.
이락사가 호국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 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는데 비석은 높이 187cm, 폭 75.5cm, 두께 22cm의 규모이다.각주1) 이항권은 통제사로 부임한 후 왕명을 받아 단을 모아 제사하고 충무공의 진충보국의 뜻을 기리는 이충무공 유허비를 세웠다. 비와 비각을 세워 추모하고 ‘이락사(李落祠)’라 했다.
1950년 남해군 주민 7,000여 명이 모금하여 유허의 정원과 참배도로를 정비했고, 1965년 4월 13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순신이 순국하다’라는 뜻의 ‘이락사(李落祠)’ 액자 2개를 친필로 써 주어 이락사에 걸게 했다.
이순신의 전몰지인 이곳은 1973년 6월 11일 사적 제232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경역 정화사업이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觀音浦李忠武公戰歿遺墟)’라고 부르게 되었다.
관음포 노량해전
7년의 왜란 기간 중 노량해전은 최후의 격전이었다.각주2)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조선에 와 있는 일본군에 철군령이 내려졌다.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는 11월 10일에 철수하기로 약속하고 남해 창선도각주3) 에 집결하기로 했다.
이를 알아차린 조선과 명나라 함대는 11월 9일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고흥군 나로도에서 광양만으로 함대를 이동했다. 일본 수군함대는 11월 10일에 약속대로 창선도에 집결했으나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만 명나라 수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고 있었다. 11월 14일 고니시 군대는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면서 간청했으나 조명 연합함대는 퇴로를 차단하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고니시는 사천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1월 18일 6시경 창선도에 집결한 일본군과 거제도와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은 500여 척의 선단으로 재편성된 후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는 고니시 군대를 구원하기 위해 노량해협에 집결했다.
한편 조명연합군은 11월 18일 22시경 장도에서 관음포를 향해 출발했고, 19일 새벽 2시경 관음포에서 조명 연합함대 150척과 일본 전함 500여 척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로 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전함을 포위하려 했으나 도리어 명나라 수군 전함의 협공을 받게 되자 후퇴했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진 일본 전함들은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공격했으며 남해 방면으로 도망치는 적선을 추격하던 중 오전 9시경 일본군 저격수가 발사한 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장군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고 10시경 전사했다.
일부 일본군은 함대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했고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도 여수 앞바다를 통해 도주했다. 육지로 오른 일본군은 선소왜성으로 도피했으며 11월 21일 선소왜성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충무공 유적비
비명은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삼도통제사 증의정부영의정익충무이공순신 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議政謚忠武李公舜臣遺墟碑)’이다. 비의 문장은 홍석주가 짓고 이익회가 썼다.
이충무공 유적비
남해읍에서 동으로 이십여 리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배가 드나들고 있는 이곳은 관음포(觀音浦) 옛적의 삼도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였으며 돌아가신 뒤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된 이충무공(李忠武公)께서 순국한 장소다.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을 대파한 이래 지금까지 이백삼십여 년 동안 해상에서는 왜적으로 인한 걱정이 전혀 없어졌지만 공은 이 싸움에서 탄환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의 시기였다. 이때를 당하여 충성과 지혜로 임금을 도와서 국가의 중흥을 이룩한 여러 사람이 있었다. 모두들 공신에 봉하고 역사에 기록되어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공적이 천지에 가득하고 명성이 해외에까지 떨쳤으니 역사가 흐를수록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충무공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옛 역사에도 충신 의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공과 덕이 영원한 후대에까지 칭송되기로는 충무공과 같이 위대한 분은 다시없을 것이다.
공의 유적으로는 좌수영(左水營)의 대첩비(大捷碑) 벽파진(碧波津)의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충무(忠武)의 충렬사비 순천의 충민사비(忠愍祠碑) 남해의 충렬사비(忠烈祠碑) 등이 있어 모두 영원한 세대에 공의 공적을 알리고 있으나 다만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이곳에는 아무런 기념물이 없었다. 금상(純祖) 32년(1832)은 선조(宣祖) 임진 이후 네 번째 맞이하는 임진년이다. 임금께서는 깊은 감회를 일으켜 당시에 공을 세운 분들에게 추숭의 예전을 베풀 때에 가장 먼저 공에게 실시하였다. 이때 마침 공의 팔세손 항권(恒權)이 공이 맡았던 삼도 수군통제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왕명을 받들어 제사를 드리고 나서 여러 주민들과 상의하고 순국한 유적지에 이 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으며 공은 또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고 하겠다.
원비 1832년 예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 형조판서 예문관 제학 이익회
서기 1980년 11월, 임창순 역술 배재식 씀 경상남도 세움
유언비
이락사 입구 잔디광장에는 충무공이 유언한 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慎勿言我死) 즉 ‘전방의 상황이 시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진 높이 8m의 유언비가 1998년 12월 20일 충무공 순국 400주년 추모식 때 제막되었다.
첨망대
이충무공 전몰 유허비각이 있는 곳에서 해안가 방향으로 500m 정도 능선을 따라가면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양만, 노량해협,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관음포 바다 너머로 광양제철소가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1년 2월 16일 2층으로 된 누각 첨망대를 건립했다.
관음포 유허 사적비
1973년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주변이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이를 알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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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 임진왜란의 흔적, 김현우,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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