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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세자 책봉 문제와 남인 · 북인의 등장
1592년 2월 정철 등 서인들은 기축옥사가 마무리되자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동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던 이산해와 유성룡이 최소한의 발언권을 행사하는데 그쳤다.
1591년 정철이 세자 책봉에 관해 거론하면서 조정 내부에 책봉 문제가 불거졌고, 동인들은 이를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선조 임금의 부인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당시 좌의정 정철은 이 문제를 임금에게 건의하려 했다. 이때 동인 이산해는 이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산해는 인빈 김씨와 뜻을 같이하여 김씨의 둘째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한편 서인 정철은 의인왕후 박씨를 만나 공빈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는다는 데 합의했다.
서인과 동인이 회동하여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한 후 광해군을 세자로 추대하여 이를 선조 임금에게 건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영의정 이산해는 두 번씩이나 회동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서인 정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동인의 계략이었다.
이산해는 선조 임금의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했다. 선조 임금은 인빈 김씨가 낳은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었는데 이산해는 김공량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인빈 김씨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했다.
인빈 김씨가 이러한 사실을 선조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몹시 불쾌해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경연장에서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선조 임금의 눈 밖에 난 정철은 삭탈관직 되었다.
1591년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물러가자 다시 동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동인 세력은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산해 측과 유배를 보내야 한다는 우성전 측으로 갈라졌다.
유성룡 ·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남인, 이산해 · 이발을 추종하는 세력을 북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유성룡이 경상도 출신이고, 우성전은 서울의 남산 밑에 살았기 때문이며, 이산해의 집은 서울 북쪽에, 이발의 주거지는 북악산 밑에 살았기 때문이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선 배경에는 정인홍과 유성룡의 불화, 우성전과 이발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 이발의 집은 북악산 아래에 있었기에 그를 북인(北人)이라 불렀고, 우성전의 집은 남쪽에 있는 남산 아래에 있었기에 그를 남인(南人)이라 불렀다.
정철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집권 동인 내부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었다. 처형하자는 강경파는 북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인은 동인과 서인 대립 시에 강경파였기에 서인이 사건수사를 담당했던 기축옥사 때 큰 화를 입었다. 이발, 최영경 등과 이산해 등이 북인에 속했다. 또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남인은 동인과 서인 대립 시 온건파였기에 기축옥사 당시 큰 화를 입지 않았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조정의 동인 세력은 한때 유성룡 · 김성일 등의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남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북인인 정인홍이 1602년에 그를 탄핵하여 다시 북인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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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유종문 편역, 『이야기로 풀어쓴 조선왕조실록』(서울: 아이템북스, 2007), 261~265쪽.
- ・ 이상각, 『조선왕조실록』(서울: 들녘, 2009),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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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자 책봉 문제와 남인 · 북인의 등장 – 임진왜란의 흔적, 김현우,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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