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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의
흔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제승당

요약 테이블
소재지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한산일주로 70
지역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면적 528,034m2)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1592. 07. 08)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적 공간으로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하는 제승당(制勝堂) 일원의 넓은 부지에 조성된 지상 건물, 각종 비석, 문화재 광장, 조경물을 통칭한다.

제승당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지금의 해군작전사령부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곳이다.각주1)

제승당은 1592년 이순신이 창건하고 전라좌수영을 설치한 곳이며, 1593년에는 삼도 수군 통제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이순신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에서 승리했으며 그 후에도 해상권 장악과 동시에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까지, 그리고 1597년 7월 16일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근 3년 8개월 동안 이곳을 삼도 수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고, 총통과 같은 신식 무기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등 군무를 관장했다.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위를 받고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그는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전쟁에 관하여 의논했으며, 한편에서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이번 왜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병사가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제반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운주당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했던 집무실이었다.

1597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할 때 도주했던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통제사 군영의 시설을 불태웠다. 곧이어 이곳으로 몰려온 일본군은 한산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바닷길은 통제영을 점령한 일본군이 다시 장악했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739년(영조 15)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0년 옛 운주당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면서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 복원되면서 ‘제승당’으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1932년에 충무영당을 건립했으며 1959년에는 제승당 일원 이충무공 유적이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10월에 중건한 제승당 건물 내부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을 그린 5폭의 벽화가 걸려 있다. 1979년에는 한산대첩비를 건립했다.

현재 제승당은 충무사, 행적비, 제승당, 한산정 수루(水樓), 대첩문, 수호사(守護舍), 한산문, 관리사무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승당 경내 안내도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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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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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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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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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각주2) 본래 작은 사당이었던 것을 헐고 1976년 10월 지금의 사당을 건립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통영 시민들이 제사를 올리며 한산대첩기념일인 8월 14일(양력)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참배한다.

사당에는 국보 제76호 서간첩(書簡帖)의 일부와 충무공이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쓴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이순신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작품이며,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구군복)각주3)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충무사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한산정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부하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으로 사정과 표적과의 거리는 145m이다.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존거리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진편에서는 떡과 막걸리를 내어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께 활쏘기를 연마한 무사들은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했던 무과특별시험에서 선발된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출신의 사람들이다. 이순신은 1593년 11월 29일 장계를 올려 한산도에서도 무과시험을 볼 수 있도록 장계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1594년 2월 7일 수군이 여러 해 동안 수고했는데도 별다른 포상이 없었다면서 무관 100명을 선발하도록 재가했다.

한산정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한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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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유허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지 142년만인 1739년 제107대 수군통제사 조경이 이곳에 제승당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 옛터에 건물을 지은 후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760년 충무공의 후손 이태상 제121대 수군통제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하면서 유허비를 손질하고 비각을 뒤로 옮겨 세웠다. 1877년 충무공의 후손 이규석 제198대 수군통제사가 제승당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 비는 그 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

유허비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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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

어허 여기는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제 천지 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시고 이제 다시 수백 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슬프다.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막을 잠깐 쳤던 자리라고 거기 나는 아가위나무(甘棠) 한 가지도 베지 말라는 노래를 지어 읊조리거늘 사직을 바로잡고 우리 창생을 살리심이 그 누구 힘이관대 차마 이 터에 풀이 우거져 있게 할까 보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지나가 차츰 더 아득해지면 저 어부와 목동들마저 집터를 잊어버려 물어 볼 곳조차 없어질는지 그 또한 누가 알리요. 그래서 이제 통제공(統制公) 조경(趙儆)이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는 뜻은 실로 여기를 표해 두자는 때문이리.

어허 인제는 천하 만세에 여기가 이장군 집터였던 줄을 알게 되리라 이제 군자 이르되 통제공 조경은 과연 능히 임금을 섬기는 분이라 하리니 그 어른(忠武公)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는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며 충성되고 의로운지라. 임금을 섬길 따름 다른 무엇이 있을까 보냐.

여기 비를 세우고 글씨를 쓴 이는 통제사 조경이요 글을 지은 사람은 도사(都事) 정기안(鄭基安)이다.

* 제승당 유허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문을 국역한 한글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서기 1979년 12월, 이은상 국역 고동주 씀 경상남도 세움

한글 유허비

1948년 12월에 광복(1945. 08. 15)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남도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비석 앞면에는 ‘리충무공 계시던 제승당의 터다’라고 한 줄로 적혀 있다. 글은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수루

수루(戍樓)는 망루의 역할을 했으며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인 이곳에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새로 건립했다. 충무공은 이곳에 자주 올라왔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고,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하던 곳이다.

수루 오른 쪽에는 고동산, 왼쪽에는 미륵산, 뒤쪽에는 망산이 있는데, 봉화 · 고동 · 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일본군 동향을 파악하고 전달하는 연락망의 중심지가 이곳이었다. 수루에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閑山島月明夜
수루에 혼자 올라 큰칼 불끈 잡고
上戍樓撫刀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深愁時何處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 더해주네
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은 통영에서 직선으로 약 6.7km 지점에 있으며, 섬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야 한다.각주4) 통영 여객터미널을 이용하는 경우 오전 7시에 첫 배가 출항하며 소요시간은 약 25분이다.

제승당 관리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해체되었다. 통제영이 해체되고 뒤이어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지방 유림이 나서서 제승당을 관리했으나 재원 조달이 어려워 점점 퇴락하여 가고 있었다. 이에 통영군민들은 제승당의 퇴락을 두고 볼 수 없다 하여 1932년 3월 15일 ‘한산도 제승당 중건기성회’를 창립하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한산도 도민들은 별도로 ‘모충계’를 결성하여 ‘충무 영당’ 건립과 충무공 영정 봉안을 추진하여 1933년 6월 2일 ‘한산도 제승당 준공식’과 ‘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했다.

광복 후인 1959년 정부가 이곳의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여러 차례 보수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 본 후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고 구국 충절의 높은 뜻을 후손만대에 전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1976년부터 유적 정화사업을 벌여 경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에는 충무사, 제승당, 수루, 한산정을 비롯하여 유허비 2기, 한글 유허비 1기, 통제사 송덕비 7기, 비각 5동과 5개 문(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충무문, 대첩문) 기타 부속 건물이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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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국립진주박물관, 『삶에서 신화까지 충무공 이순신』(서울: 예맥, 2003), 67쪽.
  • ・ 이순신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4』(서울: 비봉출판사, 2006), 263쪽.

김현우 집필자 소개

일본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저서로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국회론>..펼쳐보기

출처

임진왜란의 흔적
임진왜란의 흔적 | 저자김현우 | cp명한국학술정보 도서 소개

한국에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유물이 지역 곳곳에 분포해있다. 전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현장과 남겨진 흔적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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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임진왜란의 흔적을 찾아서(부산 · 경남) 경남 거제 경남 거창 경남 고성 경남 김해 경남 남해 경남 밀양 부산 경남 사천 경남 산청 경남 양산 경남 의령 경남 진주 경남 창녕 경남 창원 경남 통영 경남 하동 경남 함안 경남 함양 경남 합천
Ⅲ. 왜구 · 일본의 침공과 대응 왜구 · 일본을 경계하다 조선통신사의 귀국보고 백성들, 스스로 구제하다 임진왜란의 기록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사야가
Ⅳ. 임진왜란의 흔적을 찾아서(대구 · 경북) 경북 경산 경북 경주 경북 고령 경북 구미 경북 군위 경북 김천 대구 경북 문경 경북 봉화 경북 상주 경북 성주 경북 안동 경북 영덕 경북 영양 경북 영천 경북 예천 울산 경북 울진 경북 의성 경북 청도 경북 청송 경북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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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임진왜란의 흔적, 김현우,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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