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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시기 | 19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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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연주자 | 자미로콰이 |
1997년쯤이었던가?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누군가에게 바람을 맞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기에 당시 휴대전화 기능을 하던 호출기(즉 삐삐)에 카페 전화번호를 수차례 찍어 보낸 터였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나 그만 자포자기, 이미 여러 잔 '리필해' 마신 커피도 눈치가 보여서 더는 먹지 못하고 프로젝터로 보여 주는 MTV를 초점 없이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던 그날, 처음으로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음악을 들었다.
〈Cosmic Girl〉의 뮤직비디오. 나의 '꿀꿀하고 찝찝한' 기분과 전혀 맞지 않는 펑키하면서도 재미난 사운드에 귀에 쏙 들어오는 보컬이 인상적이라 뮤직비디오가 끝날 때 밑에 나오는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을 외우려 했지만, 가수 이름은 복잡해서 금방 까먹고 제목인 'Cosmic Girl'을 중얼거렸다. 곡이 끝나자마자 기다리기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크 레코드'로 향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의 바로크 레코드에서 CD 참 많이 샀다. 노란 비닐봉투에 담아 준 CD 몇 장을 들고 나서면 괜히 뿌듯함마저 느껴지곤 하던 음반가게였다. 그날 〈Cosmic Girl〉이라는 노래 제목 하나로 바로크 레코드 사장님과 함께 자미로콰이의 CD를 찾느라 적잖게 고생한 기억이 난다.
보통 댄스음악이라고 하면 우리는 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다분히 TV나 인터넷 등 매체들에 의해 '유도된' 음악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신나는 음악'이라고 하면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저마다 머릿속에 자기 나름의 신나는 음악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트로트부터 교향곡까지, 응원가부터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까지 온갖 음악이 망라된 '신나는 음악'. 그래서 이 '신나는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형용사가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빠르고 강렬한", "강한 비트의", "업 템포의", "그루비(groovy)한", "쫄깃쫄깃한", "어깨 들썩이는" 등의 애매모호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수식어들이 동원된다. 그런 말들 중에 비교적 명확한 표현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펑키(funky)'다.
펑크? 펑키?
펑크(funk) 혹은 펑키(funky)라는 스타일은 말 그대로 스타일이지 장르는 아니다. 예컨대 펑키한 재즈, 펑키한 록, 펑키한 팝이 있을 뿐이지 '펑키'라는 장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매체에서 이런 우를 범하기도 하는데, 한술 더 떠서 록 음악의 한 장르인 펑크(punk)와의 구별조차 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으스스하게도 자미로콰이는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과 같은 계보가 된다.
애초에는 재즈에서 시도된 스타일의 음악이었지만 '펑키'의 선구자는 2006년에 타계한 전설적인 소울 가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일 것이다. R&B와 결합한 펑키는 제임스 브라운의 끈적끈적하고 에로틱한 목소리와 맞물려 그에게 '미스터 다이너마이트'라는 유명한 별명을 선사해 주기에 이른다. 비교적 단순하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는 모든 장르에 '펑키 조미료'가 듬뿍 더해진 시대였다. 특히 댄스와 팝에 가미된 펑키는 디스코(disco)라는 장르를 탄생시켰고, 이후에는 아주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디스코 이후 신스팝(synth-pop, 신시사이저 사운드의 1980년대 팝 음악), 힙합, 랩 등의 댄스음악이 유행의 쌍곡선을 타고 지고 하다가 1993년, 영국의 자미로콰이라는 밴드가 이러한 '펑키 정신'의 댄스음악을 록과 애시드 재즈(acid jazz, 재즈와 힙합, 펑크, 그리고 R&B 등의 요소를 결합한 것)에 결합시켜 《Emergency on Planet Earth》 앨범을 내놓기에 이른다.
자미로콰이의 싱어이자 리더인 J.K.는 재즈가수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릴 적부터 R&B, 재즈, 소울 음악과 친숙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10대 때 돌연 집을 나가 타지를 떠돌다 감옥신세까지 지는 등 각박한 세상물정을 혹독하게 겪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작사와 작곡에 매진하다 아직 밴드 구성도 못하고 있던 주제에 'Jam'이라는 단어와 미국 인디언 부족의 이름인 'Iroquois'를 합친 거창한 밴드 이름 'Jamiroquai'를 만들게 된다. 산고 끝에 나온 자미로콰이의 데뷔 앨범은 영국에서 크게 히트했고, 이듬해 나온 두 번째 앨범 《The Return of The Space Cowboy》 역시 대중에게나 평단에게나 큰 호평을 얻으며 유럽과 일본의 마니아 층을 중심으로 그 중독성을 서서히 전염시켜 나갔다.
뿔 달린 모자를 쓴 아이의 정체
자미로콰이가 심벌로 사용하는, 이른바 '버펄로 맨(Buffalo Man)'은 뿔이 달린 모자를 쓴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는 자미로콰이의 마스코트로, 앨범과 포스터 등에서 항상 볼 수 있다. 실제로 제이 케이는 공연 등에서 늘 커다랗고 기괴한 모자를 쓰기 좋아해서 일부 호사가들에게 '제이 케이는 대머리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 심벌은 재주꾼 제이 케이가 데뷔 앨범을 내기 전에 직접 스케치했다고 한다.
유독 미국에서만큼은 인기가 없던 자미로콰이였지만, 세 번째 앨범 《Travelling Without Moving》의 싱글 〈Virtual Insanity〉와 그 뮤직비디오가 큰 성공을 거두고 명실공히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인 슈퍼밴드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J.K.의 사진기자 폭행 사건, 멤버 교체 등의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 나온 일곱 번째 정규 앨범 《Rock Dust Light Star》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구석구석의 클럽과 바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미로콰이의 펑키한 음악에 엉덩이를 흔들고 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명확한 사실이다.
《Travelling Without Moving》은 자미로콰이 사운드의 전형을 보여 주는 앨범이다. 기타-베이스-드럼의 기본 록 밴드 구성에 1970년대 디스코에서 따온 아날로그 기계 효과음, 그리고 '백인 스티비 원더'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J.K.의 탄력 있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비교적 서로 배타적인 록 마니아와 재즈 마니아 양쪽에 모두 어필할 뿐만 아니라 '너무 꺾어 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소프트코어 R&B 마니아들에게까지 사랑받는 매우 특별한 앨범이다.
자미로콰이의 대표곡 〈Virtual Insanity〉를 비롯해 〈Alright〉, 〈Cosmic Girl〉, 〈Travelling Without Moving〉 등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곡은 마치 1970년대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하는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펑키 사운드로 고집스럽게 일관된다. 한국사람들을 위해 발라드도 한 곡쯤 넣어 줬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러나 마냥 댄스록이라고 하기에는 재즈와 블루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주의 세련됨이 있어서 그런지 마니아들의 감상용 음악으로도 많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몇 년 전 자미로콰이의 이름을 벤치마킹한 듯한 국내 밴드가 있어 "음악 역시 펑키한 댄스록일까?" 궁금해 하며 인터넷을 통해 몇 곡 찾아 들었는데, 스타일이 전 세계 팝 음악의 추세인 어반 애시드 재즈팝(urban acid jazz-pop) 계열이었다. 역시 국내에서 록 음악은 계속 찬밥 신세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변에는 자미로콰이처럼 세련된 음악을 하는 밴드가 참 많이 있는데 왜 이 친구들 팬클럽이 100명도 채 안 되는지, 왜 실력 있는 뮤지션보다 영업력 있는 뮤지션들이 돈을 더 잘 버는지 늘 안타깝고도 궁금한 대목이다.
"대중음악은 재즈와 록 양쪽 날개로 난다"라는 말을 100% 믿는 나로서는 소극장과 클럽에서 더 많은 재즈 공연과 록 공연이 더 많은 관객과 마니아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케이팝(K-Pop)이 해외에서 인기 있다고 해서 마치 국산 자동차나 휴대전화를 수출한 양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 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 이제 그 규모가 세계적인 시장으로 성장한 만큼 내용도 건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앞뒤가 맞아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런 날이 곧 오리라고 믿는다. K리그 경기장과 프로야구 경기장의 관중석이 꽉 차고, TV에 나오지 않아도 배우와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활동하고 대접을 받으며,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방학숙제를 하러 오는 학생들 말고도 늘 사람들이 북적대는, 다양한 음악을 듣고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취향의 옷을 사 입는 그런 '문화강국' 대한민국 말이다.
1. Virtual Insanity
2. Cosmic Girl
3. Use The Force
4. Everyday
5. Alright
6. High Times
7. Drifting Along
8. Didjerama
9. Didjital Vibrations
10. Travelling Without Moving
11. You Are My Love
12. Spend A Lif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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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의 음반과 함께 즐거운 음악의 여정, 멋대로 듣고 대책 없이 끌리는 추천 음악 에세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음반 40장과 그 뮤지션들에 대한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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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자미로콰이 《Travelling Without Moving》 – 무인도에 떨어져도 음악, 권오섭,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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