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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시기 |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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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맥 빠지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록의 역사는 비틀즈에서 시작해서 레드 제플린으로 끝났다." 록의 역사가 고작 20년밖에 안 된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이야기지만 록 마니아라면 이 맥 빠지는 소리에 대체로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틀즈로 인해 붙은 록의 불씨를 헤비메탈 또는 하드록이라는 대형 화재로 번지게 한 방화범과도 같은 록 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은, '고작 20년' 동안 비틀즈와 비치 보이즈(Beach Boys),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가 단순히 몸을 흔들어대기 위해 만들었던 록 음악을 더 무겁고, 더 강하고, 더 깊게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비틀즈, 비치 보이즈, 롤링 스톤즈 팬들에게 미움받을 소리다.
왕년에 기타를 쳐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유명한 〈로망스〉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또는 필사적으로 익혔던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의 전주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전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레드 제플린은 늘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다. 듣기에는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 단순한 '보컬-기타-드럼-베이스 사운드'이지만 여간해서는 연주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대표곡 중 비교적 쉬워 보이는 네 번째 앨범의 〈Black Dog〉을 연주하다 박자 때문에 싸움이 붙어 해체했다는 밴드만 부지기수라는 이야기도 있다. 연주를 겨우 마스터했다고 해도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의 가공할 만한 고음 보컬 때문에 레드 제플린의 곡은 카피마저 쉽지 않다. 게다가 록 좋아하는 대중들 역시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고 다소 현학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레드 제플린 음악의 난이도 때문에 정작 음악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위대한 밴드 레드 제플린이 왠지 컬트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오죽하면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형, 에릭 클랩튼이랑 레드 제플린이랑 누가 더 기타를 잘 쳐요?" 맙소사, 유리스믹스(Eurythmics), 마크 알몬드(Mark Almond), 스틸리 댄(Steely Dan)과 함께 레드 제플린도 '사람' 대접을 받다니.
'록 밴드의 역사는 갈등과 분쟁의 역사'라는 통설이 있다. 망해도 싸우고, 성공하면 더 심하게 싸우는 밴드들의 모습을 나 역시 숱하게 봐 왔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은 그러한 통설과는 거리가 멀다. 명성과 영향력에 비해 매우 깨끗하고 단순한 이력서를 가지고 있으니 잘나가던 영국 밴드 야드버즈(Yardbirds)의 기타리스트였던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뉴 야드버즈'를 결성하기 위해 1968년 오디션을 통해 '후다닥' 모은 멤버가 바로 보컬 로버트 플랜트, 베이스와 건반에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그리고 드러머 존 본햄(John Bonham)이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록의 세계를 호령할 슈퍼 밴드의 탄생치고는 실로 밋밋하고 평범한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사무적으로' 모인 밴드가 10여 년 후 드러머의 사망으로 인기 정상에서 깨끗하게 팀을 해체한 것도 돈과 인기에 영합하여 이합집산 하는 대중음악계의 생리를 고려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렇게 '쿨한' 밴드가 또 어디 있을까?
레드 제플린 앨범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은 불타는 제플린 비행선이 그려진 데뷔 앨범과 위대한 블루스 〈Since I've Been Loving You〉가 들어 있는 세 번째 앨범이지만, 내 무인도행 배낭에 들어갈 CD로는 1975년에 나온 그들의 여섯 번째 앨범 《Physical Graffiti》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 다다익선. 더블 앨범이라 담긴 곡의 수가 15곡으로 다른 앨범보다 월등히 많고 둘째,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가 최절정이었으며 셋째, 너무 어둡거나 무겁지 않아서 좋고 넷째, 다양한 스타일의 제플린 사운드를 골고루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2집의 〈Whole Lotta Love〉, 4집의 〈Stairway to Heaven〉과 〈Rock and Roll〉같이 유명한 곡은 별로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마력적인 중독성을 발휘하는 음악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Physical Graffiti》의 숨은 공신
1975년 2월에 발매된 레드 제플린의 여섯 번째 앨범 《Physical Graffiti》는 제플린의 팬들은 물론이고 모든 음악 팬들에게 천만다행의 앨범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플린 음악의 한 축이었던 존 폴 존스가 이 앨범 녹음 직전 심각하게 밴드 탈퇴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플린의 프론트맨은 플랜트와 페이지 두 사람이었고, 뒤에서 묵묵히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기에는 존 폴 존스의 재능은 아까운 감이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결국 제플린 비행선에서 내리지 않았고 피아노, 기타, 오르간, 만돌린 등을 연주하며 레드 제플린의 후반기 음악에서 계속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콤비의 곡과 가사는 초창기 다소 원색적이고 거칠었던 티를 벗고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같은 이유로 일부 제플린 마니아들은 이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존 폴 존스 역시 베이스뿐만 아니라 기타와 건반, 멜로트론(melotron) 연주에 있어 천재적인 솜씨를 들려준다. 희대의 드러머 존 본햄의 '그루브 넘치는' 섬세하고도 강렬한 북소리는 우리의 심장을 파고들다 못해 터뜨릴 것만 같다. 실로 레드 제플린의 '클라이맥스'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혹자는 《Physical Graffiti》 앨범이 록 50년사 중 가장 위대한 앨범이지만 동시에 가장 저평가된 앨범이라고 하기도 한다.
1998년에 래퍼 퍼프 대디(Puff Daddy, 이 래퍼는 Diddy, P Diddy, Diddy Dirty Money 등으로 자꾸 이름이 바뀌니 뭐라고 불러야 될지도 모르겠다)가 영화 〈고질라〉에서 샘플링(기존 팝-클래식 음반의 연주 음원을 그대로 따서 쓰는 음악 기법)했던 신비한 동양적 느낌의 〈Kashmir〉, 지미 페이지의 변칙 튜닝 어쿠스틱 기타 솜씨가 멋들어진 〈Bron-Yr-Aur〉, 절로 어깨가 들썩여지는 〈Houses of The Holy〉 같은 곡들이 슬슬 지겨워질 때면 묘한 기타 리프와 섹시한 플랜트의 보컬이 감칠맛을 더해 주는 〈Trampled Under Foot〉, 제플린 식 하드록의 담백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The Rover〉와 〈Custard Pie〉, 드라마틱한 〈Ten Years Gone〉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그것도 시들해지면 다소 인내력을 요구하는 11분짜리 대곡 〈In My Time of Dying〉 같은 곡에도 심취가 가능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처음 좋아했던 곡들이 다시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사 록 밴드와 다른 이런 레드 제플린의 매력은 아무래도 그들의 경이로운 연주력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수많은 아류를 양산한 이들의 연주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어봐도 단연 군계일학이다.
여담이지만 이들의 음악을 20년쯤 들은 나로서는 이제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서 존 본햄의 드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진정한 힘으로 압도하는 그의 드럼에 감탄하며 그 강렬한 사운드 속에서 현란한 재즈 임프루브[즉흥연주(improvisation)를 줄여 이르는 말)를 감상하는 듯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높이 날았던 레드 제플린이 1980년, 존 본햄이 만취 상태에서 토하다가 잠이 들어 질식사로 사망한 뒤 전격 해체하면서 말 그대로 자폭에 가까운 추락을 했던 것은, 어쩌면 이미 보여 줄 것은 다 보여 준 광대가 갈채를 받으며 유유히 무대 뒤로 사라지는 모습과도 같았다.
광대는 끝까지 커튼콜에 응하지 않았다. 1985년 초유의 관심을 끌었던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Live Aid〉 재결합 무대는 추락한 비행기의 두 조종사가 낙하산을 멘 것 같은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로버트 플랜트의 안쓰러운 보컬과 지미 페이지의 둔해진 기타를 확인시켜 주는 무대가 있었지만, 아직도 전 세계의 제플린 마니아들은 그들의 편집 CD나 DVD가 나올라치면 설레는 마음으로 발매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레드 제플린의 부활
2007년 9월, 자선 공연을 위해 레드 제플린이 다시 모인다는 발표가 나자 전 세계의 제플린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3명의 멤버가 모두 모인데다가 존 본햄의 아들 제이슨 본햄(Jason Bonham)이 아버지를 대신해 드럼을 친다는 거짓말 같은 루머가 사실로 판명 났기 때문이었다. 이 공연으로 레드 제플린은 기네스 기록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티켓을 사려고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이 무려 2억 명이었던 것이다. '클릭 신공'으로 이 공연 티켓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모두가 초콜릿 공장 견학에 뽑힌 어린이 찰리마냥 날아갈 듯 기뻤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의 록은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까?'라는 심각한 화두는 음악인들의 단골 술안주다. 그때마다 군부 시대의 난센스라고밖에 할 수 없는 문화 행정, TV의 전횡, 라이브 연주의 부재, 심지어는 대마초 단속까지 갖가지 이유들이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내 주장은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우드스탁, 비틀즈, 그리고 레드 제플린이 없었잖아?"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도 레드 제플린같이 걸출한 록 밴드가 나와 아직 꽃피지 못한 대한민국 록의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 주기를 기원해 본다.
DISC 1:
1. Custard Pie
2. The Rover
3. In My Time of Dying
4. Houses of The Holy
5. Trampled Under Foot
6. Kashmir
DISC 2:
1. In The Light
2. Bron-Yr-Aur
3. Down by The Seaside
4. Ten Years Gone
5. Night Flight
6. The Wanton Song
7. Boogie with Stu
8. Black Country Woman
9. Sick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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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레드 제플린 《Physical Graffiti》 – 무인도에 떨어져도 음악, 권오섭,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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