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770. 8. 27, 슈투트가르트 |
---|---|
사망 | 1831. 11. 14, 베를린 |
국적 | 독일 |
요약
변증법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헤겔은 사랑을 대립물의 통일, 이를테면 무한자와 유한자의 모순이 포괄되고 종합되는 통일체로서 정신의 원형으로 보았다.
1788년 튀빙겐 신학교에서 2년간 철학과 고전을 배우고 1790년 졸업했다. 그의 주요한 친구는 동년배로 범신론적 시인 횔덜린과 5세 아래인 자연철학자 셸링이었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그리스 비극작품을 읽었고 프랑스 혁명에 환호했다. 이후 비판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연구하면서 종교에 관한 그의 논문에 자극을 받았다. 하이텔베르크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그의 철학체계인 <철학강요>를 저술했다. 히후 베를린대학교로 옮겼고, 미학, 종교철학, 역사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무렵 헤겔학파가 형성되었다.
초기생애
헤겔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우고 슈투트가르트 문법학교에 들어가 18세까지 공부했다. 그는 고전 저자들에 대한 주석, 신문기사들, 당시 대표적인 저작들의 도덕과 수학에 관한 논문들을 발췌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1788년 튀빙겐 신학교에서 2년간 철학과 고전을 배우고 1790년 졸업했다. 그뒤 신학과정을 밟았지만 교수들의 따분한 정통파 교리 강의에 싫증을 냈다. 1793년 졸업증서에는 철학공부에 열심이었지만 신학에는 소홀했으며 표현력이 빈약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료 학생들이 그를 '늙은이'라고 불렀지만 친구와 술을 좋아해 '바코스의 제물'이 되기를 즐겨 했다. 그의 주요한 친구는 동년배로 범신론적 시인 J.C.F. 횔덜린과 5세 아래인 자연철학자 셸링이었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그리스 비극작품을 읽었고 프랑스 혁명에 환호했다.
대학을 마치고 성직자가 되지 않고 철학과 그리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사강사가 되길 원했다.
그뒤 3년간 베른에 있으면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그리스·로마 고전들을 읽었다. 또 비판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연구하면서 종교에 관한 그의 논문에 자극을 받았다. 칸트는 정통파들이 역사적 사실과 교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자의적인 명령들로 이루어진 도덕체계를 강요하는 데 반대했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이성적 도덕을 가르쳤다고 보았으며 이 도덕이 자신의 윤리저작들과 화해할 수 있으며 종교가 모든 사람의 이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보다 더 역사적인 성격의 두 논문을 썼는데, 하나는 칸트의 맥락에서 복음을 재해석한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제로 권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적인 것이었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교가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었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베른에서 혼자 지내던 헤겔은 1796년말 횔덜린이 강사자리를 얻어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갔다. 그곳에서 더 폭넓은 교제를 바랐으나 횔덜린은 불륜의 애정관계에 휘말려 이성을 잃어버렸다. 헤겔은 감상에 시달렸으나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자신을 치유했다. 그리스 철학, 근대사, 정치학을 공부했고 신문을 읽고 스크랩했으며 고향 뷔르템베르크의 정치에 관한 논평을 쓰고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칸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해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초기 신학 저작들은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관한 강한 주장들을 담고 있다.
그는 신학 자체가 아니라 정통파를 공격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성은 주(主)의 촛불이므로 칸트가 부과한 한계에 예속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헤겔의 전저작에 넘쳐 흐른다. 1798년 그는 이전에 쓴 신학적 글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의 하나인 〈그리스도교 정신과 그 운명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1907)을 썼다. 이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고대 그리스인과 달리 삶을 사랑하지 않는 모세 율법의 노예들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물질적 충족에 만족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적 명령(율법)의 노예가 아니며 법(도덕)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신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신의 의지를 충심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공동체가 신의 왕국이며 바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왕국인데, 이 왕국은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일치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지지만 인간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인간세계에 세워질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논문에는 헤겔 체계의 중요한 개념이 들어 있다. 칸트는 인간이 현상의 유한한 세계에 관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오성(悟性)이 이 영역을 넘어서서 무한하고 궁극적인 실재를 파악하려 하면 해결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사랑을 대립물의 통일, 이를테면 무한자와 유한자의 모순이 포괄되고 종합되는 통일체로서 정신의 원형으로 보았다.
그는 이 사랑을 '정신'으로 표현했다. 칸트의 오성은 사고상의 모순을 피할 수 없지만, '정신'이나 '이성'의 활동으로서 사고는 그 모순을 해소하는 종합을 만들 수 있다.
이무렵 헤겔은 오랫동안 바랐던 대로 학계에 진출했다.
1801년 1월 셸링이 1798년 이래 대학교수로 있던 예나에 도착했다. 예나는 이미 황금기를 맞았고 슐레겔 형제의 신비주의, 칸트주의, 피히테의 윤리적 관념론 등이 성행했다. 헤겔이 도착했을 때 26세였던 셸링은 이미 몇 권의 저서로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혼자 칸트의 우둔한 추종자들에 맞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헤겔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불려온 것이었다. 헤겔의 예나대학교 강사 취직 논문이자 첫번째 출판물인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체계의 차이 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1801)에는 셸링의 자연철학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물론이고 후속 논문에서도 셸링과 헤겔의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두 사람은 그리스에 관심을 가졌고 칸트의 작업을 밀고 나가려 했고 우상파괴주의자였다. 그러나 셸링은 헤겔에 비해 너무 낭만적이었다. 헤겔은 1801~02년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강의했는데, 이때 수강생은 11명이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체계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1803년 셸링이 예나를 떠난 뒤 헤겔은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철학·정치학 뿐만 아니라 생리학 강의에 참여했고 다른 분야에도 손을 댔다. 1805년 예나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수강생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여전히 주목받는 교수는 아니었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프로이센의 부패한 관료제도를 싫어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예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환영했다.
그 전투가 있기 얼마 전에 헤겔은 프로이센을 무너뜨리고 있는 '세계정신'(나폴레옹)을 칭송했다. 이무렵 헤겔은 첫번째 저서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을 출판했다. 이것은 아마 헤겔의 가장 훌륭하고 또 어려운 책으로, 인간정신이 어떻게 단순한 의식에서 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를 거쳐 절대지(絶對知)로 상승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인간의 소박한 태도는 감각에 의존하지만 반성해보면 외적 세계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실재는 지식에 의해 개념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의식이 외부에 있는 대상을 탐구할 수 없다면 자기의식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스토아주의·회의주의를 거쳐 자기의식은 세계로부터 고립된다. 이성은 세계에 대립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바꿔 대립된 대상과 자신의 동일성을 자각한다. 그러나 '정신'의 단계에서 의식은 더이상 고립되고 비판적·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거주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구체적 의식의 가장 낮은 단계인 무의식적 도덕성의 시기이다. 그러나 문화가 증진되면서 정신은 점차 관습에서 해방된다. 도덕적 세계의 다음 단계는 종교이다. 신성함의 이념은 자연숭배와 예술을 거쳐 그리스도교에서 충만함에 이른다. 그래서 종교는 절대지, 즉 정신의 단계에 가까이 간다. 헤겔에 따르면 이곳이 진리의 장이다.
김나지움 교장
〈정신현상학〉을 쓴 뒤에도 헤겔의 경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밤베르거 차이퉁 Bamberger Zeitung〉의 편집을 맡다가 뉘른베르크에 있는 에기디엔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맡았다(1808. 12~1816. 8). 이 직책으로 적기는 하지만 수입이 안정되었다. 그는 1811년 마리 폰 투헤르와 결혼했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들 사이에는 2명의 아들, 즉 역사가로 유명해진 카를과 신학에 흥미를 가진 이마누엘이 있었고 예나 시절의 사생아 루트비히도 함께 살았다. 1812년 뉘른베르크에서 〈논리학 Wissenchaft der Logik〉의 제1부인 〈객관논리학〉이 나왔고, 1816년 제2부인 〈주관논리학〉으로 완성되었다.
헤겔의 체계가 처음 본격적·궁극적 형태로 제시된 이 저작으로 에를랑겐·베를린·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 요청이 들어왔다.
대학교수 시기
하이델베르크 시기
헤겔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강의를 위해 〈철학강요 Encyklopädie der philosophis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그의 체계 전반을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헤겔 철학은 전우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의 체계는 정신적 일원론이지만 차이를 중시하는 일원론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고는 차이를 경험해야만 사고와 그 대상의 '동일성'(同一性)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진리는 오류가 경험되고 진리가 승리할 때에만 인식된다. 그리고 유한자가 한계를 지닌 것이고 신이 이 한계를 극복하기 때문에 신은 무한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도덕적 선에 이르려면 인간의 타락은 필수적이다. 정신은 자신을 자연과 대비해야만 자기자신을 인식한다. 헤겔이 우주를 파악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우주를 절대정신이 자기자신을 정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영원한 원환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파악은 ① 정신 자신의 사고를 통해서, ② 자연을 통해서, ③ 유한한 정신이 역사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예술·종교·철학에서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헤겔 체계의 개요인 〈철학강요〉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논리학은 사고의 순수한 범주 또는 형식을 다루는데, 이것은 모든 물리적·지성적 생명의 구조를 이룬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한 존재'(모든 것의 가장 추상적인 범주)에 관해 생각하려 하면 그것이 단순히 텅빈 것, 즉 무(無)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는 '존재한다'. 순수존재 개념과 무의 개념은 대립적인 것이지만 상호이행한다. 여기에서 2가지 계기는 부정되면서 동시에 긍정되어 생성된다. 생성하는 것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은 점차 복잡한 범주들을 거치면서 절대이념 또는 자기 자신에게 객관적인 정신에 도달한다.
논리학에서 탐구된 범주들은 서로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와 달리 자연은 외적 관계의 영역이다. '공간'의 부분과 '시간'의 순간은 서로를 배제한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안에 있고 그래서 유한하다. 그러나 자연은 정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 창조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범주들은 자연 안에서 그 본질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자연철학의 과제는 이 구조와 변증법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면성의 영역인 자연은 비록 자연에 잠재되어 있는 이성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일 수는 없다.
인간 안에서 자연은 자기의식으로 성장한다. 정신철학에서 헤겔은 무의식, 의식, 이성적 의지를 통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따라간다. 정신은 이 의지의 구현 또는 객관화인 인간의 제도와 역사를 거치며 마지막으로 예술·종교·철학을 거쳐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정신으로, 절대적 진리를 지닌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이제 인간에게는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생각하는 길이 열린다. 마지막에 헤겔은 체계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그 출발점에 내포되어 있던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그것은 '정신만이 존재하며, 정신은 순수한 활동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헤겔의 체계는 철저한 과학적·역사적·신학적·철학적 탐구 결과에 의지한다.
베를린 시기
1818년 헤겔은 피히테가 죽은 뒤 비어 있던 베를린대학교 철학과 교수직 제의를 수락했다.
베를린에서 학생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컸으며, 〈자연법과 국가학 개요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다른 제목으로는 〈법철학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1)를 출판했다. 〈법철학강요〉는 3부분으로 나뉜다. 첫부분은 법과 권리 일반에 관한 것이다. 인격은 법의 주체이다. 법은 추상적·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 의지의 보편적 기반에서만 정의가 작용한다.
그런데 개인은 법뿐만 아니라 양심적 확신과 일치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세계의 문제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는 사회와 정치 질서를 구성하는 것이다(법철학). 그리고 이렇게 이성의 요구를 충족하는 정치질서는 한편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거나 양심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개인에게 확신의 자유를 허용하고,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적대관계를 피해야 한다.
국가는 가족과 직업단체에 의존해서 이런 종합을 이룬다. 헤겔의 이러한 국가 개념은 당시 존재했던 어떤 국가와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 헤겔이 생각하는 국가는 제한된 군주제이고, 의회를 갖춘 정부이며, 배심원에 의한 판결을 하며, 유대인과 반대자들에 관대한 정치 형태이다. 〈법철학강요〉를 출판한 뒤 헤겔은 강의에 진력했다. 1823~27년에 그의 활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학·종교철학·역사철학·철학사에 관한 책이 편집·출판되었는데, 주로 수강생들의 노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논리학·심리학·자연철학에 관한 내용은 〈철학강요〉에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시기에 수백 명의 수강자들이 독일 전역과 외국에서 몰려들었다. 그의 명성은 열성적인 제자들에 의해 해외로 퍼졌다.
베를린 시기에 특히 미학·종교철학·역사철학에 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종교철학에 관한 강의는 종교에 그의 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헤겔은 종교를 일상의 세속적 정신과 양립할 수 있는 사소한 것으로 축소한 합리주의학파를 비판했다.
또 감정을 체계적 신학 위에 있는 종교의 지위로까지 끌어올린 슐라이어마허 학파도 비판했다. 헤겔은 중도적 방식으로 교조적 신조가 종교적 감정에 내포된 것이 합리적 발전임을 보여주려 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철학은 종교에 대한 해석자이자 더 우월한 분야가 되어야 했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인간 역사 전체가 정신적·도덕적 진보를 이루어가고 자기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역사가 신의 목적을 연출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해왔다고 믿는다. 그 목적은 인간 자유의 점진적 실현이다. 그 첫 단계는 노예적인 자연의 삶에서 질서와 법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힘과 폭력에 의해 세워진다. 질서잡힌 생활의 이성적 성격을 받아들일 만큼 정신적으로 진보하기 전에는 법을 지키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많은 사람이 노예로 머무르는 반면 몇몇 사람이 법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지는 단계가 있다. 근대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인간의 과제는 인간이 실제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무렵 헤겔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는 똑똑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우둔한 모방자들과 철학을 서정적인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낭만주의자들도 있었다. 비록 그가 브란덴부르크의 학교들과 공식적인 연계를 거절했지만 프로이센에서 그의 실질적 영향력은 매우 컸다.
1830년 그는 대학 총장이 되었으며 183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의 최후의 학문적 시도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의 〈과학적 비판을 위한 연보 Jahrbücher für wissenschaftliche Kritik〉를 만드는 것이었다. 1830년 혁명으로 헤겔은 충격을 받고 몸져 누웠다. 그의 최후 저작은 1832년의 영국 개혁법안에 관한 논문으로, 의회의 새 의원들의 성격과 그들이 도입할 새 법안이 지닐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1831년 독일에 콜레라가 퍼졌다. 헤겔과 가족은 여름에 교외로 휴가를 갔는데, 거기서 〈논리학〉의 첫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을 마쳤다.
11월 14일 겨울 학기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가 하루를 앓고 난 뒤 콜레라로 죽었다. 자기가 원했던 대로 피히테와 풍자적 변증론자인 카를 졸거 사이에 묻혔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철학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