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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2. 6. 21, (독일) 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 근처 슈미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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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0. 12. 2, 튀빙겐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신학자·학자.
성서비평에서 프로테스탄트 튀빙겐 학파를 창시했다. 교회사 분야에서 현대적 연구의 아버지로 불렸다. 블라우보이렌 신학교와 튀빙겐대학에서 공부한 뒤 1817년 블라우보이렌 신학교에서 신학교수가 되었고, 1826년 튀빙겐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독일의 철학자 G. W. F. 헤겔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전시켰다. 헤겔은 역사를 서로 반대되는 두 세력 정과 반의 활동으로 보았는데 이 두 세력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서 합이라는 제3의 세력을 형성한다. 〈신약성서〉의 목회 서신을 연구하면서 바우어는 유대 그리스도교(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관습이 섞임)와 이방 그리스도교(유대교 영향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교로 간주됨)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었다고 보게 되었다. 유대 그리스도교가 정이고 이방 그리스도교는 반, 즉 반작용이며, 가톨릭교가 헤겔 철학의 합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로 Paulus, der Apostel Jesu Christi〉(1845)에서 바우어는 사도 바울로의 생애와 사상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했고, 그때까지 바울로가 썼다고 여겨졌던 서신들 모두가 바울로의 작품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갈라디아·고린토·로마에 보낸 편지만 바울로가 썼으며,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시대 이후의 사람이라고 보았다.
〈사도행전〉은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갈등을 종합·조화시키고 있으므로 두 그리스도교 사이의 갈등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던 1세기에 씌어졌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복음서 저자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복음서들에는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중재·타협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경향론'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최초의 복음서, 즉 후대의 저자들이 고쳐놓기 전의 복음서가 있었다고 가정했다.
생애 후기에 바우어는 교회사에 관심을 쏟았다. 5권으로 된 그의 〈그리스도교 교회사 Geschichte der christlichen Kirche〉(1853~63)는 속죄·삼위일체·성육신 교리에 대한 그의 저술들과 함께 오늘날에도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바우어의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비판적 역사검증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견해가 거부당했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방법과 결론은 성서학과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바우어의 업적에 대해서는 카를 바르트의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1947)과 피터 C. 호지슨의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의 교회사 서술 Ferdinand Christian Baur on the Writing of Church History〉(1968)에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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