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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

다른 표기 언어 philosophy of history , 歷史哲學

요약 인간사회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론과 역사학의 과제와 가능성에 대한 철학이론을 총칭하는 용어.

역사라는 용어는 첫째, 인간의 과거를 이루는 사건과 행위의 총칭, 둘째, 인간의 과거에 대한 설명과 탐구방식이라는 2가지 의미로 쓰인다. 역사의 성격에 관한 철학적 반성도 첫째, 역사과정 전체와 그 과정의 경로와 방향을 포괄적으로 해명·설명하는 전통적 또는 고전적 의미의 역사철학(사변적 역사철학)과, 둘째, 역사가들이 그들의 자료에 접근하고 파악하는 데 사용하는 절차·범주에 관해 연구하는 2차적 탐구(비판적·분석적 역사철학)라는 2가지로 구별된다(→ 역사편찬).

사변적 이론

역사에 질서·계획이 있다는 생각

인간의 역사과정에서 어떤 일반적 도식이나 계획, 포괄적 목적이나 유형을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변적 이론가들은 첫째, 역사과정이 자의적 사건의 연속이나 임의의 사건과 에피소드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유형이 필요하며, 둘째, 역사를 궁극적으로 이 유형에 따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면 인간생활과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기원

역사의 의미에 관한 서구의 사변은 주로 신학에서 나왔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순환운동이라는 그리스·로마적 사고와는 달리 역사란 직선적 발전 운동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교 초기에 성행했다. 이러한 접근의 흔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죽은 지 1,250년이 지난 뒤에 보쉬에는 〈보편사론 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1681)에서 역사의 전과정이 '매우 높은 지혜'의 계획에 의존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내세웠다.

신국론

ⓒ Augustinus/wikipedia | Public Domain

그는 국가의 흥망과 종교적 신조의 흥망은 결국 섭리의 숨은 질서에 의존하며 섭리가 역사적 정의(正義)와 응보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의 반향은 컸지만 그 영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이러한 목적론적·섭리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세속적 접근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와 그 이후 사상가들은 자연과학의 이론들과 유사한, 설명력을 지닌 가설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역사와 사회에 관한 과학을 정립하려 했다.

그들은 인간사의 운명에 관한 종교적·형이상학적 추측의 시대는 끝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관찰 가능한 구체적인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을 구성해내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해석은 인간에 관한 연구를 무지, 불확실성, 원시적 미신으로부터 구해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고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보편타당한 사회과학의 창출이라는 이념은 개혁과 혁명의 이상을 촉진하기도 했다. 18세기 콩디야크·콩도르세와 19세기 앙리 드 생 시몽, 오귀스트 콩트, 존 스튜어트 밀, 헨리 토머스 버클은 과학적 절차를 통해 인간의 발전을 연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모두 실천적 목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개입했다. 이들에게 이론은 실천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즉 지식은 힘이었다.

새로운 과학

비코와 헤르더는 18세기 역사 이론가들 가운데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기초한 모델과는 다른 길을 추구했다.

잠바티스타 비코는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3판, 1744)에서 인간은 자연 세계에 관한 지식과는 다른 지식, 즉 인간 자신의 행위·창조물·제도에 관한 지식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코에 따르면 어떤 것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 즉 자연과학자가 연구하는 실재는 신의 창조물이므로 오직 신만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역사의 주제를 이루는 '국가세계'는 인간의 산물이므로 인간이 알 수 있다.

새로운 과학(Scienza nuova)

ⓒ Lalupa/wikipedia | Public Domain

이와 같이 비코는 역사탐구와 다른 연구 사이의 유사성보다는 그 차이를 강조했다. 이와 비슷하게 독일의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는 〈인류사의 철학에 관한 이념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4권, 1784~91)에서 '시간, 장소, 국가의 성격', 즉 문화환경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에서 인간의 행위와 성취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원히 타당한 추상 법칙으로 과거의 사고와 행위를 설명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각각의 사회는 그 나름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지니며, 그것들은 미묘하지만 불가피하게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규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성향과 욕구를 추상적 정식으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는 없다.

변증법적 역사관

19세기 독일 관념론은 역사의 행로를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헤겔은 사회 전체의 '유기적' 성격과 서로 다른 역사 시기의 공약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역사의 운동을 역동적인 것으로 그려내는 포괄적 관점을 정립했다. 헤겔에 따르면 자연영역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규칙성과 반복성은 정신세계에는 낯선 것이며, 정신세계는 끊임없이 자기초월을 지향하고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려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자유는 투쟁과정과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서만 완성될 수 있다. 이때 극복해야 할 장애 자체는 인간 자신의 활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특정 사회의 가능성이 어떤 생활양식을 창조함으로써 실현되고 나면 그 역사적 역할은 끝난다. 이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생활양식의 부적합함을 인식하고 이전에 받아들인 법칙과 제도를 족쇄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과정의 각 단계는 그 자신을 파괴하는 씨앗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그결과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사회의 최종 모습은 이성적으로 질서지워진 공동체이다. 이성적 공동체에서는 각각의 시민들이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공동체와 일치시키며 더이상 어떠한 소외나 제약도 없다(헤겔주의).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가 '변증법적' 형식으로 진행한다는 헤겔의 생각, 즉 한 단계에서 생긴 모순은 다음 단계에 극복된다는 생각을 자신의 사회변혁이론에 통합했다.

그는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이며 객관적 실재인 물질세계와 마주하면서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본적 진리는 마르크스가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였다. 이때 역사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자연환경에서 생산수단을 얻고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을 얻는 방식의 변화가 지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분업과 생산관계는 역사 운동의 근본 요소이다. 마르크스가 '정치제도·법률체계·도덕·종교 등을 포괄하는'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가 만든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적 동인은 생산수단의 변화에서 생기는 갈등이며, 그것은 한 단계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적용된 사회의 조직·통제 양식이 다른 단계에서는 방해가 될 때 일어난다.

이 갈등은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에 의해 해소된다(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체계들

역사에서 대규모의 유형과 포괄적인 통일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는 20세기에도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Der Vntergang des Abendlandes〉(1918~22)과 아널드 토인비〈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934~61)가 가장 유명하다. 토인비는 문명에 관한 비교연구를 통해 슈펭글러와는 달리 현재 서구사회가 필연적으로 소멸할 것이라 보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개입 가능성의 여지를 허용하여 결정론적 사고양식을 순화하려 한다.

분석적 문제

역사개념

웅장한 사변적 도식보다는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갖는 특수한 성격을 규정하는 작업이 19세기말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빌헬름 딜타이와 베네데토 크로체와 같은 사상가들은 목적론적이거나 사이비 과학적인 포괄적 체계를 부정하고, 역사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더욱 분명하고 깊이있게 통찰하고, 역사탐구가 근거로 삼는 전제를 해명하려 했다. 크로체의 영향을 받은 R.G. 콜링우드는 철학자는 전체 역사과정에 대한 객관적 전망을 제시하려는 웅장한 포부를 버리고 역사 연구 절차를 명료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현대 사상가들은 실제로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고와 기술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설명과 이해

크로체와 콜링우드는 역사가들의 중요한 가정, 즉 역사적 사건을 자연에 적용되는 보편법칙 밑으로 끌어들여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콜링우드는 역사적 이해에 관한 설명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사건이 귀납에 의해 정립된 일반적 통일성이나 규칙성의 사례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식있는 합목적적 행위자의 편에서 과거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사건을 설명한다. 이때 역사가는 상상을 통해 그 생각을 재구성하거나 재연(再演)한다. 실증주의자들은 인간 연구에 적용되는 범주와 절차가 유일하거나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카를 헴펠이 최초로 역사에 적용한 '귀납적-규범적 법칙' 또는 '포괄 법칙'이란 설명이론에 따라, 어떤 역사 사건을 다른 사건들로 설명하려면 피설명항인 사건과 그 원인 또는 조건인 사건을 연결해주는 법칙이나 일반명제를 반드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증주의적 접근에 대한 반대는 다양하게 제기된다.

이러한 반대에 따르면 실증주의적 설명은 역사적 사건의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을 간과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W.H.드레이는 포괄법칙의 결함을 지적하고 '합리적 설명'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역사적 설명의 기능은 역사적 개인의 행위가 그의 특수한 믿음·목표·원칙·전망 안에서 조망될 때 '적합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영미 이론가들은 설명이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포함한다는 가정을 비판했다.

이들은 (예를 들면 피터 윈치처럼) 과거 행위에 대한 역사적 기술에 필요한 것은 행위자 자신이 그들의 행위·용어·관습에 의미를 부여하는 측면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객관성과 가치평가

역사의 서술이나 절차는 다른 학문 분과(화학·생물학 등)와 비교할 때 주관적이거나 문화적으로 결정된 편견이 지배하는가? 이와 관련해서 역사 서술에서 가치평가의 역할이 문제가 된다.

또 인간의 동기와 특성을 평가하기 위해 역사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가치평가를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로부터 자유롭거나 객관적인 역사적 어휘를 새로 만들 수는 없다. 모든 역사가는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한, 반드시 상대적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처럼 역사 서술에서 가치평가의 요소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가가 전제하는 도덕적·정치적 관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밖에도 역사적 행위자의 자유와 책임, 역사 사건의 성격과 그것에 대한 기술 등이 문제가 된다.

역사가 '있는 그대로'이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기능이 순수하게 역사적 사고와 논증의 전형적 양식을 기술적으로 밝히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수립된 절차의 타당성이나 정확성에 관한 규범적 문제는 항상 제기될 수 있다. 이런 규범적 문제가 철학적 비판·평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억지로 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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